홈리스에서 국가대표로… 보육원 청년의 희망 킥오프

입력 2024-10-25 00:01
2024 서울 홈리스 월드컵에 참가한 팀 코리아 선수들. 김성준씨 제공.

“누구나 살면서 울타리 밖으로 내몰리지 않는다는 보장 있습니까?” (영화 ‘드림’ 대사 중)

홈리스들의 축구 국가대표 도전기를 그린 영화 ‘드림’. 영화의 배경이 된 ‘홈리스 월드컵’은 주거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위한 특별한 축구 대회다.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이 대회는 지난 9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됐다. 팀 코리아는 36개 남성팀 중 27위로 대회를 마무리했지만, 선수들은 우승 이상의 의미를 얻었다.

"거침없이 킥"… 홈리스 월드컵에서 피어난 꿈
홈리스 월드컵에서 만난 선수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김성준씨. 김씨 제공

주장 김성준(25)씨는 자립준비청년을 대표해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보육원에서 자랐다. 현재는 보육원을 나와 대학에 다니며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함께 지내던 형들은 아무 이유 없이 그를 때렸다. 형들이 보육원을 나가면서 폭력은 끝났지만, 그간의 기억들은 김씨에게 아픈 상처가 됐다.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 또한 그를 힘들게 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다행히 김씨에게는 가족같은 보육원 원장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선생님을 “할머니이자 엄마”라고 불렀다. 김씨는 선생님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자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그는 “돌아가신 선생님처럼 훌륭한 어른이 돼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고 했다.

등번호 7번의 김성준씨가 상대팀 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빅이슈코리아, 홈리스월드컵재단 제공

김씨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준 또 하나의 계기는 축구였다. 그는 5년 전 카디프 홈리스 월드컵에 출전한 보육원 친구들을 봤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국가대표로 뛰는 친구들이 어색했지만 멋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도 태극마크를 달고 저곳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대회에 다녀온 친구의 제안으로 ‘만사소년 FC’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만사소년 FC는 ‘호통 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부산지법 판사가 위기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축구단이다. 김씨는 이곳에서 축구 실력을 쌓으며 국가대표에 대한 꿈을 키웠다.

오랜 꿈은 현실이 됐다. 김씨는 올해 수차례의 테스트를 거쳐 대표팀 최종 명단에 올랐다. 더불어 감독의 눈에 띄어 주장을 맡게 됐다. 감독은 그의 간절함과 진지함을 높이 평가해 주장을 제안했다. 김씨는 깊은 고민 끝에 “잘 해내고 싶다”는 각오를 다지며 팀 코리아의 캡틴이 됐다.

경기 시작에 앞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주장 김성준씨. 연합뉴스

대표팀의 첫 상대는 독일이었다. 김씨는 독일전에서 한 골을 넣으며 4-0 승리에 기여했다. 첫 번째 승리 후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지만 이내 쓰라린 패배가 계속됐다. 특히 전년도 준우승팀이자 홈리스 월드컵 랭킹 1위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는 0-10이라는 큰 스코어로 졌다. 그러나 김씨와 선수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모두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팀 코리아의 최종 성적은 4승 7패다. 목표했던 순위에는 못 미쳤지만 김씨와 선수들에게 홈리스 월드컵은 소중한 경험이 됐다. 대회 관계자는 “성준이는 대회를 치르면서 선수로서, 주장으로서 꾸준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마디로 성장형 캐릭터였다”고 평가했다.

'홈리스 = 길거리 노숙인' ?
영화 '드림' 포스터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팀 코리아. 영화 '드림' 포스터 캡처. 빅이슈코리아·홈리스월드컵재단 제공

홈리스라면 흔히 길거리 노숙인을 떠올린다. 그러나 집이 없어야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최측은 더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자립을 위해 다양한 배경의 선수들을 모집했다. 실제로 팀 코리아는 자립준비청년, 난민 신청자, 위기 청소년, 지적 장애인 등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로 구성됐다.

국제연합(UN) 역시 홈리스의 기준을 넓게 정의하고 있다. 집이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홈리스로 본다. 그러나 한국의 법은 ‘노숙인 등’으로 대상을 좁게 해석하고 있어 보호받는 사람들의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안병훈 팀코리아 단장은 “홈리스라는 단어가 국내에서 여전히 낯설다”면서 “적절한 주거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다. ‘노숙인’ 대신 ‘홈리스’라는 용어를 쓰면 더 많은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꿈꾸며 사는 인생… 두려울 것 없어" 빛나는 도전정신
장영훈 수석 코치와 추억을 남기는 김성준씨. 김씨 제공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요”

김씨는 대회를 통해 자신을 믿고 도전하는 법을 배웠다. “살면서 느껴왔던 감정들이 부끄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대회가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가 학업에 집중하고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복지 자격증을 준비 중이다. 그는 “일단 무엇이든 도전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앞으로 사회복지사가 되어 아이들을 보호하고, 나 자신을 더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 진행에 도움을 준 12명의 해외 자원봉사 심판 중 4명은 과거 이 대회 선수 출신이다. 이들은 홈리스 월드컵 재단의 지원으로 FIFA 심판 자격을 얻었다. 안병훈 단장은 “이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지금껏 대회에 참가한 450여 명의 선수가 경험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목표를 위해 노력한 시간은 그들의 삶에 큰 자산이 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청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꿈꾸고 살아가는 인생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보세요. 좋은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사각지대]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은 이야기를 다룹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모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이경민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