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로봇이 내려옵니다…시작, 서기”
최신형 웨어러블 로봇인 ‘워크온슈트 F1’에서 작은 소리로 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휠체어에 앉은 채 자신의 다리에 미리 로봇을 착용해 둔 김승환 연구원의 품으로 슈트 본체가 쏙 들어왔다.
재빠르게 슈트의 나머지 부분까지 착용을 완료한 김 연구원은 심호흡을 하고는 이내 우뚝 일어섰다. 이윽고 그는 힘찬 구호를 외치고 성큼 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옆으로 걸어서 의자에 앉았다 일어나기, 가벼운 짐 들기와 같은 어려운 과제도 막힘 없이 선보였다. 과제를 시연하고 나서는 가볍게 두 손을 들어보이는 여유도 보였다.
당당히 선 채로 취재진과 만난 김 연구원은 “로봇을 처음 착용했을 때에는 걷는 방법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착용을 하고 몇 걸음을 걸으니 ‘이런 감각이었구나’ 싶었다”며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는 지금 이 순간의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과 엔젤로보틱스가 하반신 완전마비 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웨어러블 로봇인 워크온슈트 F1을 24일 공개했다.
워크온슈트는 연구팀이 2015년부터 연구해 온 웨어러블 로봇이다. 이번에 공개된 F1 모델은 하반신마비 중에서도 중증도가 가장 높은 ASIA-A(완전마비) 레벨을 대상으로 제작했다.
지난 2016년 ‘워크온슈트1’을 발표한 공경철 KAIST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2020년 ‘워크온슈트4’를 발표하면서 로봇의 보행속도를 비장애인의 정상 보행속도와 맞먹는 시속 3.2㎞까지 끌어올렸다.
속도는 크게 향상됐지만 연구팀은 세계 유수의 웨어러블 로봇 개발사 모두가 단순히 ‘앞으로 걷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걷기에 모든 기능을 집중할 경우 앉기, 옆으로 걷기, 수그리기 등 다양한 동작이 필요한 일상생활에서 로봇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웨어러블 로봇은 착용을 위해 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미 국제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경험이 있었던 연구팀은 ‘장애인들이 타인의 도움 없이 일상에서 쉽게 착용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자’는 신념으로 워크온슈트 F1을 개발했다. 워크온슈트4의 후속 모델인 만큼 5번째(Five)라는 의미, 앞으로(Front) 로봇을 착용한다는 의미, 개척한다는(Frontier) 의미를 담아 F1이라고 명명했다.
신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모델인 만큼 워크온슈트 F1은 최신 기술이 대거 탑재됐다.
워크온슈트 F1은 스스로 서 있다가 착용자가 착용을 원할 경우 마치 휴머노이드 로봇처럼 착용자 앞으로 걸어온다. 무게중심을 능동적으로 제어하는 기능을 적용했기에 착용자가 실수로 로봇을 밀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 기능도 구현됐다. 로봇의 발 부분에 6채널 지면 반영 센서가 탑재돼 있는 덕분이다.
주목할 점은 다른 사람이 직접 착용자를 들어서 로봇에 앉혀줘야만 하는 위험하고도 번거로운 절차가 이젠 필요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용자가 휠체어 등에서 발에 로봇을 착용하면 로봇이 전면부로 내려와 품 안으로 안기면서 쉽게 착용할 수 있다. 일어난 뒤 균형이 제대로 잡히면 클러치(지팡이)를 잡지 않고도 균형을 잡은 채 보행이 가능할 정도로 성능 역시 크게 개선됐다.
‘착용하는 로봇’이라는 말처럼 웨어러블 로봇 본연의 기능도 대폭 향상됐다. 직립 상태에서는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클러치가 없을 때에도 수 걸음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균형 제어 성능이 향상됐다.
공 교수는 “워크온슈트는 장애인을 위한 웨어러블 로봇 기술의 결정체”라며 “현재 전국 100여곳의 기관이 우리 로봇을 이용해 재활치료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웨어러블 로봇은 아주 먼 미래, 혹은 10~20년 뒤에 일어날 꿈이 아닌 이제 동네 재활병원에 가면 찾을 수 있는 현실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의 가장 가까운 목표는 27일 열리는 ‘제3회 사이배슬론’ 대회 출전이다. 스위스에서 4년마다 개최되는 장애 극복 사이보그 올림픽이라 불리는 대회다. 일부 참가자는 스위스 현지에서, 일부는 각국 경기장에서 생중계로 경기를 진행한다. 공 교수 연구팀은 엔젤로보틱스에 설치된 경기장에서 온라인으로 참가한다.
올해는 6개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던 지난 대회와 달리 10개로 과제 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난이도까지 크게 올랐다. 대회를 앞두고 전 세계 16개팀이 출사표를 던졌지만 난이도가 워낙 높아 기술개발 과정에서 많은 팀이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 대회 주장을 맡은 박정수 연구원은 “이미 지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만큼 이번 대회에서는 순위 경쟁보다 기술적 초격차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대전=전희진 기자 heej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