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A씨는 거주 중인 오피스텔 1층에 편의점이 있지만 입구에 턱이 있어 이용하지 못한다. 장애가 있는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도 집 근처 편의점이 3곳이나 있지만 휠체어로 이용할 수 없는 상태다. A씨 등 3명은 2018년 4월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해 ‘1층이 있는 삶’ 소송을 시작했고, 6년6개월만에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섰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이숙연 대법관)는 이날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 소송 공개변론을 열었다.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첫 전합 공개변론이다.
쟁점은 정부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있는 소규모 소매점’ 범위를 확대하지 않고 시행령을 방치한 것이 위법한지, 나아가 손해배상 책임도 있는지다. 옛 ‘장애인 등 편의법’ 시행령은 편의점 등 소규모 소매점은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일 때만 경사로 등 설치 의무를 규정했다. 1998년 시행돼 2022년까지 24년간 유지됐다. 바닥면적 합계가 300㎡를 넘는 편의점은 3%(2019년 기준)에 그쳐 장애인 접근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A씨 등이 편의점 운영사 GS리테일 및 정부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은 2022년 2월 GS리테일이 직영 편의점에 이동식 경사로 등을 구비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시행령 개정 의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정부 배상 책임은 기각했다. 정부는 그해 4월에야 ‘바닥면적 합계 50㎡’로 시행령 범위를 넓혔다.
원고들은 정부가 부실한 시행령을 장기간 방치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거듭 주장했고, 대법원 공개변론으로 이어졌다. 휠체어를 타고 출석한 배 이사는 “얼마 전에도 점심을 먹으려 30분을 헤매다 (접근시설이 설치된) 음식점을 한 곳도 찾지 못해 점심을 굶고 회의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반면 정부 측은 “소매점 대신 온라인몰이나 장애인 편의시설이 있는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등 소매점 접근권은 다른 권리에 비해 대체수단이 많다”며 “소상공인 부담을 고려해 점진적 변화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오경미 대법관은 이에 “장소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대체되는 권리라고 말하는 것에 좀 놀랐다”며 “온라인 주문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건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만 하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대법원장은 “(시설 설치 의무 소매점을) 전체의 5%도 안 되게 해놓고 정부가 시행령으로 할 바를 다했다고 하는 건 도저히 이치에 안 맞는 것 아닌가”라며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게 숫자 자체로 명백한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서경환 대법관은 “소송의 파급효과도 문제”라며 “‘지체장애인 21만명에게 100만원씩 배상할 경우 총 2100억원이고, 국가배상 예산 3000억원에 필적한다’는 국가 측 염려가 있다. 현실적으로 금액이 얼마나 필요한지 염두에 둔 게 있느냐”고 원고 측에 묻기도 했다.
이번 사건 판결은 정부의 부작위(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 책임이 문제가 되는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결과에 따라 큰 파장이 예상된다. 선고는 대법관들의 최종 토론을 거쳐 2~4개월 이내 이뤄질 전망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