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공동 주최한 제10회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에서 입상한 작품입니다. 국민일보 ‘더 미션’은 입상 작품 전체를 매주 월요일마다 소개합니다.
조금 느리지만 같이 걸어갑니다
김정호
일상부문 최우수상(밀알복지재단 이사장상)
영화 ‘안녕헤이즐’에서 헤이즐은 우울증을 진단받는다. 갑상선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폐가 손상되어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힘든 헤이즐. 어른들의 눈에는 이런 헤이즐이 우울해 보였나 보다. 엄마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암 환자 모임에 나가게 된 그녀. 그곳에서 골육종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어거스터스를 만나 운명같이 사랑에 빠진다.
어거스터스에게는 망막암에 걸린 이삭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모니카라는 예쁜 여자친구가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삭과 모니카는 헤이즐과 어거스터스 앞에서도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는데, 그는 사랑을 속삭이며 이렇게 말한다.
“Always.”
닭살이 돋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삭. 이런 영화의 스토리 상 이삭의 미래가 밝아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순간 옆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아니 아직 슬픈 장면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게 울 정도의 장면인가.
“어떻게 ‘언제까지나’라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야? 저건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니잖아.”
여자친구와 5년을 만나왔지만 이런 감성적인 모습은 처음이었다. 울고 있는 여자친구를 다독여 주었지만 왜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 그때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계기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여자친구와 함께 여름휴가 계획을 짜고 있을 때였다. 한창 실시간으로 카카오톡을 주고받으며 여행 일정을 짜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여자친구와의 첫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에 무척 들떠 있었다.
“여기 이 식당은 꼭 가보자. 2층에 있다는데 꼭 들러야 한다고 하네? 평가가 엄청 좋아.”
그런데 실시간으로 채팅처럼 진행되던 카카오톡이 이 한마디 이후로 멈춰버렸다. 내가 추천해 준 식당을 찾아보고 있는 걸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1시간 2시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걱정이 되었다. 잠들었나? 그럴 리가. 아무리 늦어도 잠들기 전에는 꼭 인사를 해 주지 않았던가.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수신거절. 이어서 몇 번의 전화를 더 시도했지만 결국 여자친구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가 가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거절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주고받았던 카카오톡을 돌이켜 봐도 실수라고 할 만한 대화는 보이지 않았다. 고민과 당혹감에 빠져있는 사이에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나 사실은 이런 병이 있어.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해.”
대화 내용과 함께 전송된 링크에 접속해 보았다. 안면견갑상완 근이영양증 FSHD. 유전자 질환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약해지는 희소병. 현재 의학기술로는 치료 방법이 없다. 천천히 근력이 약해지며 종국에는 걷지 못하게 되는 만성 퇴행성질환이다. 그제야 그동안 보였던 여자친구의 모습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굽이 있는 신발을 신지 않게 되었던 일. 걸어 다니는 데이트 코스가 짧아지기 시작했던 일. 가까운 거리를 가도 꼭 차를 타고 갔으며, 계단이 있는 곳은 가지 않았던 일. 조금씩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걷는 게 힘에 부치던 여자친구. 늘 가장 가까운 데서 보고 있던 내가 그런 것들을 모르고 있었다니.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질환 특성상 나이가 들수록 급격하게 나빠질 텐데 어떻게 그동안 힘든 내색 한번 안 했을까.
바로 여자친구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걱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지금 가서 어쩌려고? 내가 간다고 이 병을 고쳐줄 수 있는가? 아니 그 전에 나는 이 사람을 평생 책임질 수 있는가. 연애와 결혼은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향후 몇 년 이내에 장애인이 될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까? 밤새 고민하고 울면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이른 새벽 무작정 여자친구의 집으로 달려갔다.
“우리 결혼하자. 원래 돈 좀 더 모으고 말하려고 했는데, 우리 작더라도 빨리 시작하자”
말없이 앉아있던 여자친구에게 바로 속마음을 말했다. 밤새도록 고민한 뒤 나온 결론이다. 망설임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 병 다 말해줬잖아. 나 앞으로 더 나빠질 거라고. 나중에는 걷지도 못한단 말이야. 장애인이 될 거라고”
“그럼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같이 걷자. 못 걸으면 휠체어 타고 같이 다니면 되지. 인생을 빨리 달리려고 널 만난 게 아니야. 조금 느리고 천천히 가더라도 누구랑 함께 가느냐가 중요하잖아. 밤새 생각해 봤는데, 난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여자친구가 비장애인이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장애인이 된다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남들보다 조금 불편할 순 있겠지만 그게 우리의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은 여자친구와 함께 참 많이 울었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보통의 신혼부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다리의 근력이 조금씩 약해지던 아내가 장애 등급을 받았다는 것 정도. 그렇지만 아내의 장애가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다. 우리는 걸음이 남들보다 조금 느릴 뿐, 행복이 차오르는 것까지 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혼의 달콤함이 익숙함으로 바뀌어갈 때 즈음, 우리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사실 결혼할 때 2세 계획은 뚜렷하게 세워두진 않았었다. 나는 자식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입장이었고, 아내는 출산은 하고 싶지만 혹시나 자신의 질병을 아이에게 물려줄까 봐 걱정이 많았다.
아내의 질병이 아이에게 유전될 확률은 50%. 높다고 하면 높고 낮다고 하면 낮은 확률이다. 평생을 도박과 같은 요행수와는 거리를 두고 온 나의 인생에서 최초이자 최후가 될 도박이 아이의 유전질환이라니. 아내의 마음속에 기쁨이 채 차오르기 전에 불안감이 더욱 빠르게 차올랐다.
“나 너무 불안해…. 내 아이도 나와 같은 병이면 어쩌지?”
이미 우리의 품에 들어온 소중한 아이를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았다. 다만 아내는 출산 전에 꼭 결과를 알고 싶어 했다.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선물해 줄 것인가 마음의 준비는 필요했던 것 같다.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진료의뢰서를 받아 서울대 병원으로 갔다. 국내에서 출산 전 양수로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었다. 그곳에서 들은 소식은 당장은 임신 초기이기 때문에 방법이 없으며, 어느 정도 주차가 지나면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때부터 아내는 검사결과가 나오기까지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지냈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때때로 찾아오는 극심한 불안과 우울함에 눈물 흘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옆에서 다독이며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양수검사 전날 우리는 서울대 병원 산부인과에 입원 했다. 양수에 긴 바늘을 꽂아 검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전날 입원하여 미리 준비가 필요하다 하였다. 그날 밤은 아내가 잠이 들 때까지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연애할 때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 맛있는 걸 함께 먹으러 간 기억들. 신혼여행을 갔었던 일들. 애써 아이와 관련되지 않은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에서 함께 보낸 그 날 밤은 참 길었다.
양수검사는 분만실에서 진행되었다. 보호자 대기실에는 여러 명의 보호자가 모니터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 이외에는 다 출산을 기다리는 보호자들로 보였다. 빰빠밤밤빰. 축하 노래가 나오며 수술실에서 산모들이 하나둘 나온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이 있었다. 모두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축하하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 오직 나만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앉아있었다. 수없이 되뇌었다. 혹시나 아이가 질병을 물려받더라도 사랑으로 키우리라. 내가 돈이라도 왕창 벌어서 꼭 행복하게 해줘야지. 그래도 가능하다면 아내의 아픔을 아이가 물려받지 않길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양수검사 결과로는 유전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검사결과를 듣던 그 날은 잊을 수가 없다. 매일 밤 불안과 걱정에 눈물짓던 아내의 눈가에 기쁨인지 후련함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준비된 상태에서 부모가 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출산 이후 갈수록 근력이 약해지는 아내와, 일로 바쁜 나는 작은 생명 하나 돌보기도 버거웠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장인어른, 장모님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아이를 돌봐주셨다.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 걸까, 아이는 배려심 깊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 이제 6살이 된 아이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말도 곧잘 한다. 가족이 함께 밖에 나갈 때는 되려 자기가 먼저 엄마의 손을 잡고 말한다.
“엄마는 slow 하니깐 조심조심 걸어요. 걸을 때 민준이가 손잡아줄게요.”
아이의 따뜻한 손과 마음이 우리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 느리지만 같이 걸어간다. 하지만 우리의 행복은 결코 느리지 않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