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상시에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뜻하는 자격지심은 어떻게 보면 열등감과 비슷한 단어 같지만, 의미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격지심은 ‘자신의 어떤 면에 대해 스스로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의 평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그는 반에서 2등을 하고도 자격지심을 느낀다”라는 표현처럼 “저는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고 식당을 운영해서 나름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남들은 그런 저를 부러워하지만, 저로서는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힘들어요”하고 말한다면 그건 자격지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볼게요. A 권사님은 다재다능합니다. 어린이집 원장으로 근무하는 권사님은 말씀도 잘하시고 노래와 율동, 거기다 음식 솜씨까지 좋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상황에서도 자신은 못 한다며 나서지 않으십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A 권사님을 향해 겸손하다고는 하는데, 어째 그 말투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때로는 겸손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거나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A 권사님의 이런 모습은 자기 자신을 탐탁잖게 여기는 자격지심이 그 원인인데 말입니다.
이런 것도 일종의 자격지심일 수 있어요. 주일 아침 옷을 입으려는데 마음에 드는 옷이 없습니다. 망설이다 하는 수없이 예전에 사다 놓고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을 꺼냈고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옷을 입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로비에서 마주친 사모님이 “우~와, 꽃무늬 원피스가 참 잘 어울려요”라고 하였죠. 사모님은 정말로 멋져 보여서 칭찬한 건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그 옷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모님의 칭찬을 비꼰 것으로 해석을 하였지요.
실제의 나보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이처럼 실제 나의 능력이나 모습과 상관없이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할까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괜찮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칭찬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가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말이나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모에 자격지심이 있으면 외모에 관한 얘기만 나와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봅니다.
자격지심과 관련하여 미국의 다트머스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어요. 책 ‘모든 관계는 심리학으로 풀린다’에서 재인용 합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이번에 진행할 실험은 얼굴에 큰 상처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내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상처 분장을 해준 후 다른 사람과 대화하도록 했지요. 얼마 후에 실험참가자들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 무례하고 불친절하게 자신을 대한 것처럼 느꼈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험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가자들에게는 그들의 얼굴에 상처를 그린 후에 거울로 보여줘서 상처가 있다고 믿게 하고는, 실험 진행자가 “지워지지 않게 마무리할게요.” 하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상처를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에 상처가 있다고 믿은 실험참가자들은 자신의 얼굴에 있는 상처 분장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한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알면 무시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한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는 걸 말해줍니다.
이처럼 자격지심은 자기에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위축되어서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맘껏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앞의 사례에서 A 권사님은 자격지심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재능들을 교회에서 발휘하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에게는 겸손을 빙자해서 잘난 체를 하는 아주 교만한 사람으로 보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에 자격지심을 갖고 있을까요
노래 실력이 수준급이어도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이번에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그 사람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자신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니까 객관적으로 볼 때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그걸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는 순간 별 볼 일 없는 게 되어버릴 수 있어요.
D 집사님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D 집사님은 대학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성악을 전공했다거나 직업이 가수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노래 실력이 수준급입니다. 그런 목소리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찬양대를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찬양 대원중에 성악이나 실용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아졌고 D 집사님은 음악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위축되기 시작했지요. 찬양 대원들이 모이면 의례적으로 “어디서 공부하셨어요”라는 질문이 서로 자연스럽게 오갔는데, 그럴 때면 자신도 그 질문을 받을까 봐 불안했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자신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자격지심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은 본인이 진짜 열등해서 생기는 것은 아니죠.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그 사람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열등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D 집사님이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찬양대로 활동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더욱이 D 집사님이 고졸이라는 걸 다른 찬양 대원들이 안다고 해서 무시할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물론 D 집사님도 교회가 개척된 초창기에는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없어서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찬양을 잘하는 것으로 인해 우월감마저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찬양대가 대졸자 그것도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로 채워지다 보니 자신이 가졌던 우월감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비교’에 바탕을 두는 한,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열등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열등감은 교회에서조차 가면을 쓰게 만든다
그렇다면 D 집사님은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남과 비교하는 걸 멈추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에 만족하며 그걸 누리면 됩니다. 참새가 독수리와 비교하면서 독수리보다 빠르게 날지 못한다고 투덜대며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대학을 나오지 않은 걸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감사하며 그것을 온전히 키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D 집사님은 대학을 나오기는커녕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니까 이론적인 면에서는 다른 찬양 대원들보다 부족할 수 있겠죠. 하지만 찬양대를 할 때 음악적 이론이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니잖아요. 그저 집사님의 아름다운 목소리,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걸 인정하는 겁니다.
집에서 생활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화장도 안 하고 가장 편안한 옷을 입고 편하게 생활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집이란 그 어느 곳보다 편안한 장소이기 때문이죠.
그럼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우리의 영혼이 쉬는 곳이기에 당연히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도 편하고 또 안전해야 하는 곳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집보다 더 편안함을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열등감이 크면 교회에 와서도 그 열등감을 감추려고 여러 가지 가면을 덧쓰게 됩니다. 그러면 가면을 쓰고 있느라 지쳐버리겠죠. 그래서 가면을 벗고 쉴 수 있는 또 다른 모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독하기 위한 모임이 또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믿지 않는 친구를 만나 털어놓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그 기능을 잃고 단지 사교적인 모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영적 노숙자의 삶’이라 할 수 있겠죠.
글=강현숙 작가, 치매돌봄 전문가, ‘오십의 마음 사전’(유노책주) ‘치매지만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생명의말씀사) 저자
편집=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