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미션 only] 키워드로 읽는 한국 찬송가의 발자취<3> 연합

입력 2024-10-14 14:17
글·김용남 한국찬송가공회 국장

1890년대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었다. ‘찬미가’는 1892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발간한 가사 위주의 찬송가로 1902년에는 207곡까지 증보됐다. ‘찬양가’는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117곡의 악보를 포함해 편집, 출판한 찬양집이었다. ‘찬셩시’는 1895년 장로교 선교사들이 54곡을 엮어 출판했고 주로 서북 지역에서 사용되다가 1902년 장로교공의회에서 공식 찬송가집으로 채택한 후 1905년 137곡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분산된 찬송가들을 하나로 통일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 결과 1908년 ‘찬숑가’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교파의 외국 선교사들은 교파 및 선교부 간 연합과 협력을 위해 협의체 조직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장·감 연합 기관이 ‘개신교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였다. 1905년 선교연합공의회는 첫 사업으로 연합 찬송가 제작을 결의하고 ‘찬숑가’ 편찬에 착수했다.

1908년 출간된 장감 연합 찬송가인 '찬숑가' 표지 모습. 한국찬송가공회 제공

편집위원에는 감리교 벙커 선교사, 장로교 안애리(Annie Laurie Baird), 민로아(F. S. Miller) 선교사가 선정됐다. 세 사람의 역할은 각각 자신의 장기에 따라 달랐는데 찬양가(1894)의 편집위원이었던 벙커 목사는 작사와 작곡의 악센트를 조율했고, 찬셩시(1905)의 번역과 편집에 참여했던 안애리 선교사는 번역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민로아 선교사도 가사 번역과 수정 작업에 참여했다.

1906년 제2차 선교연합공의회에서는 기존 찬송가를 토대로 개정하되 존경어를 사용하고 구조는 명확하며 교리에 부합하는 내용을 수록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그렇게 해서 1908년, 한국교회 최초 연합 찬송가인 ‘찬숑가’가 가사판(262곡)으로 발행됐고 이듬해에는 악보판도 출간됐다.

찬숑가(1908) 초판의 구성은 장로교의 찬양가(1894년)에서 30편, ‘찬셩시’(1905년)에서 113편, 감리교의 ‘찬미가’에서 82편을 채택하였고 나머지 31곡은 새로 선별하여 삽입하였다. 이처럼 찬숑가 초판은 262곡이었는데 1909년 악보판에는 ‘백만 명 구령가’가 삽입돼 267장으로 구성되었다. ‘백만 명 구령가’는 당시 복음전도의 열기를 반영한 것으로 복음전도운동에 힘을 싣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특별 전도기간이 끝나자 1916년 개정된 악보판 2판부터는 백만 명 구령가는 삭제되었으며 1942년 최종본에는 317장까지 증보되어 출판했다.

‘찬숑가’ 서문에는 교회 연합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혀두었다. “노래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 저절로 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마음을 같이하며 기운을 화평하게 하고, 한 곡조로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감리회에서는 ‘찬미가’를, 장로회에서는 ‘찬셩시’와 ‘찬양가’를 불러왔기에, 양 교회 신자들이 함께 예배볼 때 서로 다른 찬송가로 인해 온전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기회를 주셔서 두 교단의 노래를 합하여 ‘찬숑가’라는 한 책을 만들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참 아름다운 찬송집이다.”

1908년 찬숑가 초판의 제작비는 미장로교 본부와 미감리교 본부에서 갹출하여 충당하였다. 그러나 1909년 악보판 찬숑가의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스스로 찬송가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때 마침 미국성서공회에서 권서로 파송된 선교사인 피터스 선교사(한국명 피득·Alexander A. Pieters·1871~1958)가 개인사비를 헌신하여 출판할 수 있었다. 피득 선교사는 미국성서공회 파송 선교사로 1895년 조선에 권서로 파송된 선교사이다.

피터스(한국명 피득, 왼쪽) 선교사의 가족들로 피득 선교사, 장남 르우벤, 차남 리처드, 아내 에바 필드 선교사(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국찬송가공회 제공

권서(Colporteur)는 원래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운반하는 자인데 봇짐을 지고 무역업을 하는 행상을 일컫는 단어였다. 후에 조선인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행상이 성경책이나 전도책자를 판매하며 전도인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권서로 불렸다. 최초의 한국인 권서는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했던 서상륜(1848~1883)이다. 서상륜은 만주 뉴촹 닝코우항에 홍삼을 팔러왔다가 병이나 죽게 되었을 때 마침 아일랜드장로회 선교사인 헌트 박사의 치료를 받았다. 그후 로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영접하고 1882년 5월 세례를 받은 후, 영국성서공회의 권서로 파송받아 복음서 500권을 조선땅에 전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권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미국성서공회에서 조선의 권서로 파송 받은 피득 선교사의 사역은 또 다른 차원의 권서로서 역할하게 된다. 피득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될 때까지 구약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에 능통한 피득 선교사의 사명은 당연히 구약을 한글로 번역해 한국인들에게 구약성경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피득 선교사는 탁월한 언어능력을 발휘해 조선에 파송된 4년이 되는 해인 1898년 시편을 번역한 ‘시편촬요’를 출간했다. 시편촬요는 시편 전체 150편 중 62편을 골라 우리말로 번역해 출판한 것으로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었다.


‘시편촬요’를 시작으로 1938년 ‘구약개역성서’를 완간하기까지 피득 선교사가 한국 선교 역사에 구약성경 번역을 위해 헌신한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피득 선교사의 주된 사역은 성경 번역이었으나 찬송가를 특히 사랑했기 때문에 1909년 악보판 ‘찬숑가’ 제작비가 없다는 말에 선뜻 자신의 사비를 헌신하였던 것이다. 피득 선교사의 헌신으로 1909년판 ‘곡됴찬숑가’는 4판까지 총 9만권이 출판되었다. 찬숑가의 원자료가 된 찬송가집은 생키와 로빈슨의 찬양집 2개에서 200곡 이상 대다수 채용했고, 그 외 6개 찬양집에서 약 15개 곡을 선정해 266곡을 편집했다. 원자료 대부분을 채용한 찬양집 2개는 생키(Ira David Sankey)가 편집한 ‘복음찬송가’(Gospel Hymns: Nos. 1 to 6, 1895)와 장로교 목사인 로빈슨(C S Robinson)이 편찬한 ‘주 찬양의 새노래’(THE NEW LAUDES DOMINI : A Selection of Spiritual Songs, Ancient and Modern, 1892)이다.


한편, 찬숑가 4판 뒷면 저작권 표지에 보면 ‘지은이: 조선 평안북도 선천군 피득 목사, 발행인: 영국인 서울 종로 반우거(G W Bonwick)’로 인쇄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영향 아래에 있던 조선 상황을 고려해 출판 금지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저작권 표기를 선교사 명의로 했던 것이다. 피득 선교사의 이런 세심한 노력에 힘입어 ‘찬숑가’는 판을 거듭하며 최종적으로 1942년 판에는 317장으로 증보됐고, 감리교의 ‘신정찬송가’(1931)와 장로교의 ‘신편찬송가’(1935)가 나오기까지 20년간 두 교단이 함께 사용했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하나의 찬송가를 제작한 이 시도는 한국교회 전 교단이 ‘통일찬송가’(1983)라는 한 권의 찬송가를 사용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09년 악보판 ‘찬숑가’ 266곡 중 가사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178곡이 ‘통일찬송가’에 수록되었고 ‘21세기 새찬송가’에 다수 포함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이처럼 ‘찬숑가’는 한국 찬송가 발전에 있어 장·감 선교사들의 연합이 맺은 성공적인 결실이자 후대에 교회 연합의 열매로 찬송가집이 탄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