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숙 작가의 교인 풍경-9] 교회공동체 안에서 ‘나답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입력 2024-10-13 00:05
게티이미지뱅크

예배의식을 위하여 제단 위에 장식된 꽃꽂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잘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매번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시겠죠.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그럴 것 같아요. 이 말은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활동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매주 제단 위에 장식된 꽃꽂이를 보면 기분 좋은 것을 넘어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통해 각자 자신만의 존재감을 맘껏 발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공통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다른 점도 많습니다. 외모로부터 시작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기질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요. 나아가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이랄까요. 내가 잘하는 나만의 강점도 모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 사람이 얼굴로부터 시작해서 성격이나 재능, 그리고 취향까지 모두 같다면 살기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따분하고 재미없는 건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겠죠. 장미꽃이 아무리 예쁘다지만 이 세상의 꽃들이 모두 장미꽃이라면 보기가 어떨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품은 우리를 구별하시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는데, 인간은 그런 ‘구별’의 은혜를 ‘차별’이라는 나쁜 것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백인은 가치가 높고 흑인은 가치가 낮다’라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가치의 꼬리표를 붙여놓았지요.

때로는 ‘다름’을 ‘비교’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리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네가 아무리 음식 만드는 것에 재능이 있어도 아빠는 네가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판사나 변호사가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요. 이 말에는 음식을 만드는 일보다는 판사나 변호사가 더 낫다는 비교의 뉘앙스가 담겨있지 않나요.

우리는 모두 다른데 ‘하나님의 형상’이라서 귀하다

어느 자매는 이런 말을 했어요. 자신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예쁜 줄 알았답니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 이모 고모가 늘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유치원에서 짝꿍이 하는 말이 ‘우리 유치원에서 OO가 제일 예쁘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그 친구도 똑같은 말을 하였답니다. 그때 엄청 충격을 받았다고 했는데, 사실 예쁘다, 예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평소 사람들이 외모를 대놓고 비교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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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이런 집사님도 있었어요. 이 집사님은 눈이 작아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단춧구멍 눈’, ‘새우젓 눈’ 이런 별명을 달고 살았는데, 그런 별명이 너무 싫었다고 해요. 충분히 이해가 가죠. 그런데 어느 날 중동 지역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너무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고 하죠.

뭐냐면 그 지역 사람들은 왜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고 그렇잖아요. 그래서인지 눈이 보일까말까 한, 이 집사님이 그들에게는 연예인처럼 특별하고 귀하게 보인 겁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건 모래알이나 자갈들처럼 흔하지 않기 때문인 것처럼 그 지역에서는 눈이 크고 쌍꺼풀이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이 집사님처럼 눈이 작은 사람은 드물었기에 귀한 대접을 받았고 그러다 보니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버렸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외모나 성격, 그리고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사람들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맘껏 느끼고 또 발휘하도록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는 다르게 서로의 ‘다름’이 비교나 차별의 대상으로 둔갑 되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습이나 재능을 누리기는커녕 재능을 찾았어도 자신이 원하는 재능이 아니면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름’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해가는 삶을 살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주신 모습이나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될까요. 우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다름’을 ‘차별’이나 ‘비교’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그다음으로 나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 할까요. 그런 재능 즉 나만의 강점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나만의 아름다운 삶을 일궈가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고 악기를 잘 다루고 하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재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 나의 모습까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타고난 기질이나 재능에다 주어진 환경에 의해 나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도 재능에 해당합니다. 일례로 부모가 하숙집을 운영했고 자라면서 부모의 일을 거들다 보니 음식 솜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도 나만의 특별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누군가를 만나면 상대방을 이모조모로 배려하면서 그가 원하면 기꺼이 그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것도 그 사람만이 가진 재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재능’ 그러면 머리를 써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말을 유창하게 하거나 글을 쓰는 능력이 뛰어나든지 하는 걸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형편에 공감을 잘하고 배려하는 행동도 아주 훌륭한 지능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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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연구한 학자가 있는데, 하워드 가드너(H. Gardner)는 다중지능 이론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가 하는 말에 공감을 잘하는 능력을 특별히 ‘대인관계 지능’이라 칭하였지요.

우리 각자가 가진 재능이 어떤 것이든 간에 중요한 건 우리의 재능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고 하나님은 그 재능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해가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재능을 통해 ‘사명자’로 살아가길 원하시지요.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인 나만의 재능을 찾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어떤 직업적인 일을 할 때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그 일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놀이처럼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서적으로 즐겁고 또 만족감이 느껴져야 신앙생활이 즐거울 수 있으니까요.

교회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할 때 신나고 즐거운가요?

K 집사님은 구역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구역장들만의 모임이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어느덧 신앙생활을 한지 수년이 지났고 권사 직분을 받게 되면서 그렇게도 바라던 구역장이 되었습니다. 구역장이 된 건 좋은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역예배를 인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구역원 중의 한 명이 성경에 대해 꼬치꼬치 질문하면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목사님께는 구역장 노릇이 버겁다는 마음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무조건 구역을 바꾸어달라고만 했어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결국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자신이 잘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고 그래서 남들로부터 인정이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을 찾아 그곳으로 몰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주차요원으로 봉사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고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교회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할 때 신나고 즐거운가요. 그렇다고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면, 그건 교회 안에서 나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표시일 겁니다.


글=강현숙 작가, 치매돌봄 전문가, ‘오십의 마음 사전’(유노책주) ‘치매지만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생명의말씀사) 저자

편집=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