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이긴 열정’ 시니어 뮤지컬 ‘망대’ 배우들의 땀과 도전 이야기

입력 2024-10-09 14:25 수정 2024-10-09 23:08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짧음을 깨닫고 이제 주님께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건강과 마음, 그리고 육신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비록 육신이 피곤하고 쇠약할지라도, 이 자리에서 도전하며 희망을 전하는 시니어 뮤지컬 배우들을 기억하시고, 이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서울 강남사회종합 복지관 내 뮤지컬 연습실. 서울시 지정 전문예술단체인 사단법인 코리아 큐코 멀티 예술협회 이사장 최경희(64) 대표의 기도가 끝나자 국민체조 음악이 흘러나왔다. 형형색색의 바지를 입은 시니어 남녀 배우들이 음악에 맞춰 힘차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체조 도중 시니어 배우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시니어 배우들은 오는 11일과 12일 강남구민회관에서 열리는 뮤지컬 ‘망대’ 공연을 준비하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58세부터 80세까지 다양한 나이의 배우들이 부산 울산 파주 등 전국 각지에서 매주 먼 길을 달려와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뮤지컬 ‘망대’는 각자가 쌓아온 돈 명예 권력 지식 재물 등의 성곽을 상징한다. 인생의 후반기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이 결국 허무함을 깨닫게 한다. 이제는 외적인 성곽이 아닌 빛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된 성곽을 추구해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최 대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전도서를 통해 지혜를 주셨다. 또 성경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배우들의 종교는 각각 다르지만, 뮤지컬 망대의 스토리를 통해 성경적 가치를 바탕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내고자 했다”고 전했다.

시니어 배우들은 대본을 외우는 것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수백 번씩 반복해 읽은 대본에 형광펜으로 빼곡히 그어진 표시들이 그들의 노력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영순(77) 배우는 “친구의 초대로 우연히 시니어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큰 감동을 받아 나도 도전하게 됐다. 나이가 들어 대본과 안무를 외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다른 배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대사를 휴대전화에 녹음해 끊임없이 반복해서 듣고 연습한 덕분에 이제는 상대 배우의 대사까지 외울 정도”라며 “모든 배우들이 맡은 역할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대단하다. 그 열정이 무대에서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고 고백했다.

'나도 할 수 있다!' 도전과 열정이 빛나는 뮤지컬 '망대' 연습실


“선생님, 동선 챙기세요. 무대 가운데로 들어가셔야죠. 자기 자리 찾아보세요!”
“어디 가셨지? 선생님, 옆에서 함께 도와주셔야죠!”

최 대표의 날카로운 지적에 시니어 배우들은 “알겠습니다”라고 답하며 다시 연기에 몰입한다. 작은 역할 하나조차도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해석하며 진지하게 연습에 임한다.

김국애(77) 단장은 “이 나이가 되면 어디서든 지적받는 일이 드물지만 여기서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배우로서 더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전했다.

“대표님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모든 배우가 최선을 다합니다. 마치 약한 열매는 떨어지고 단단한 열매만 나무에 남듯이 우리 시니어 배우들은 지적받을 때마다 더 끈기 있게 버티고 스스로를 다잡습니다. 지적을 받을수록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의지도 강해져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시니어 배우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젊은 배우도 있다.

직장인 연극단에서 활동 중인 박영진(30)씨는 이번 ‘망대’ 뮤지컬에서 부잣집 아들과 앙상블 역할을 맡아 무대에 오른다. 시니어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는 그의 존재는 이번 작품에 색다른 생동감을 더해준다.

그는 “지인의 소개로 시니어 뮤지컬에 참여하게 됐는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어르신들께서 손자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때때로 어르신들이 동선을 헷갈리시거나 대사를 잊으실 때도 있지만 그 과정을 함께하며 기다리는 것이 내게도 큰 배움의 시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어르신들의 열정은 매번 저를 놀라게 하고 그 모습을 보며 깊은 존경심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노인이 행복과 의욕을 느낄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돼야


최 대표가 이끄는 시니어 뮤지컬은 2020년에 시작됐다. 처음부터 시니어 뮤지컬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는 어린이 인성교육을 위해 동화책을 집필하며 아시아 문인협회 작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뮤지컬 대본을 집필하고 연출했다.

최 대표는 “아이들이 뮤지컬을 통해 인성을 기르고 그 안에 복음의 메시지를 담아 공연할 때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감동받는 모습을 보며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후 최 대표는뮤지컬 연출을 공부한 후 38편의 뮤지컬 대본을 집필하고 직접 연출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생 열심히 살아왔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들이었다.

고령화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을 위한 문화적 공간과 기회는 전무했다. 이 문제에 주목한 최 대표는 시니어들에게 무대에서 빛날 기회를 제공하고자 시니어 뮤지컬을 기획하게 됐다.

그는 “우리나라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100세 이상 노인이 7000명을 넘었고 65세 이상 인구도 1000만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분들이다. 이분들이 삶에서 행복과 의욕을 느끼며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사회가 돼야 우리나라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인들이 활기차게 참여하고 무대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니어 뮤지컬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인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교육은 많았지만, 시니어 배우들을 무대에 세우는 곳은 없었다. 반복적인 지도가 필요해 쉽지 않았지만 최 대표는 그들을 무대에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아 시니어 배우들이 무대에서 삶의 경험과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또한, 배우들이 뮤지컬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해 교육 분야에서도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최 대표는 시니어 배우들이 젊은이들과는 또 다른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분들은 자기 자신과 끝까지 싸워 이겨내려는 의지가 정말 강하다”며 “‘과거에 멋지셨잖아요?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내실 수 있어요!’라고 격려하면서 더 큰 노력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전했다.

시니어 배우들의 열정이 빛나는 순간

2020년 코리아 큐코 멀티 예술협회는 서울시 지원으로 강남구민회관에서 첫 공연 ‘인생 단 한번의 선물’을 선보였다.

1200여 명의 관객 앞에서 시니어 배우들은 긴장해서 대사를 잊기도 했지만 완벽함보다는 도전과 열정이 빛난 공연이었다. 무대 위 시니어 배우들의 도전은 관객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줬다.

최 대표는 시니어 배우들과 공연을 준비하며 잊지 못할 순간들을 회상했다. 2년 전 한 배우가 공연장으로 오는 길에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감사하게도 5일 만에 아무런 후유증 없이 깨어났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배우가 첫 마디로 ‘오늘 뮤지컬 공연 날인데, 나 공연 시간 늦어 어떡하지?’라고 말해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며 “다음 해 그 배우가 다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온 가족이 눈물을 흘렸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배우는 아내의 별세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시니어 배우들은 각자의 고난을 딛고 헌신과 열정으로 무대에 서며, 그들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것이 시니어 뮤지컬의 특별한 매력입니다.”

그래서일까. 매년 공연이 끝날 때마다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어르신들이 코리아 큐코 멀티 예술협회를 찾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며 다양한 배경의 시니어들이 모여 각자의 경험과 열정을 무대에서 표현하고 있다.

뮤지컬 1기부터 함께 해온 이원강(77) 배우는 “42년간 초등 교육에 종사하고 퇴직했다.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단어로 자녀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도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큰 손녀가 아빠에게 ‘할머니처럼 즐겁게 사세요’고 말하는 것을 보고 뮤지컬을 도전을 통해 자식들에게 즐겁게 사는 법을 이미 유산으로 남겼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덧붙였다.

시니어 뮤지컬이 가진 특별한 힘 '도전과 치유'

‘망대’ 역할 속 배역은 곧 자신의 삶과 닮아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배우, 10여 년 전 남편을 잃은 배우, 암 진단을 받은 배우 등 시니어 배우들은 각기 다른 아픔과 사연을 안고 무대에 선다.

이들은 모두 인생의 깊은 상처와 외로움을 겪었고 때로는 우울증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홍진숙(54) 배우는 “어릴 적 뮤지컬배우를 꿈꿨지만 바쁜 삶에 쫓겨 꿈을 이루지 못했다. 위암 수술 후 마음이 무척 힘들고 우울했었다. 지방으로 이사하면서 이런 문화 활동을 접할 기회는 더 없을 줄 알았는데, 지인을 통해 코리아 큐코 멀티 예술협회 뮤지컬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의 협조를 받아 매주 토요일 서울로 올라와 연습에 참여했다. 뮤지컬을 통해 몸과 마음이 치유되고, 다시 삶의 활기를 찾고 있다. 시니어 뮤지컬은 이처럼 오랜 꿈을 되살리고, 마음의 치유와 새로운 에너지를 선사하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했다.

시니어 배우들은 뮤지컬을 통해 연기를 넘어 마음의 치유와 위로를 경험하고 있다. 동료들과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삶의 활력도 되찾았다.


고령화 시대에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사단법인 코리아 큐코 멀티 예술협회는 지난 8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2024 서울 탄생 실버 세대공감축제’에서 서울시장상을 수상했다.

최 대표는 “빠르게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이 시대에 한국 교회가 시니어들의 삶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업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시니어들은 사회에 기여해온 중요한 구성원이며 그들의 지혜와 경험은 우리 사회의 자산이다. 하지만 여전히 소외되고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시니어들이 단순히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활기차게 참여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와 사회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니어 배우들은 다가오는 공연을 앞두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매일 열심히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뮤지컬 ‘망대’는 ‘2024 서울탄생&실버 세대공감축제’ 프레 공연을 시작으로 11일 오후 7시, 12일 오후 2시와 6시에 강남구민회관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김국애 단장은 “이번 ‘망대’ 뮤지컬이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길 바라며 이 작품을 통해 노인들도 여전히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의 도전을 보고 다른 노인들도 ‘나도 해볼까?’라는 용기를 얻어 새로운 도전에 나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긴 세월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담아 시니어 배우들이 전하는 ‘망대’ 속 대사는 관객들에게도 삶의 진정한 목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할 것이다.

“난 천국에 잘 도착했네. 와보니 세상의 집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정말 멋지다네. 와서 보면 쏘옥 마음에 들거야. 난 이제 이곳에서 편히 쉬려네. 가져오지도 못할 것을 모으려고 인생 시간 낭비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다 광대놀이네. 자네들은 시간 낭비하지 마.”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