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띄어쓰기’ 첫 제안자는 윤치호, 독립신문은 한글 대중화의 실험실이었다

입력 2024-10-08 14:39 수정 2024-10-09 10:04
윤치호 장로의 젊었을 때 모습. 옥성득 교수 제공



‘한글 띄어쓰기’ 도입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 기존의 H. 헐버트 박사나 J. 로스 선교사가 아닌 좌옹 윤치호(1865~1945) 장로라는 주장이 교계에서 나왔다.

한글 띄어쓰기 도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윤치호의 글은 옥성득 미국 UCLA 교수가 8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다.

옥 교수가 언급한 윤치호의 글은 선교사들이 만들던 간행물인 ‘코리언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 1896년 1월호에 실린 ‘콤마 혹은 스페이싱(Commas or Spacing)’이라는 제목의 영문 칼럼이다.

글에서 윤치호는 “베이컨은 ‘어떤 책은 맛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씹고 소화해야 한다’고 했는데 쉼표와 띄어쓰기 없이 언문(한글)으로 쓴 책은 맛없고 삼키고 소화하기 힘들다”면서 소설 ‘삼국지’의 한 대목을 예로 들었다.

그는 “(띄어쓰기가 없으면) ‘장비가 말을 타고’를 ‘장비 가말(가마)을 타고’라고 잘못 읽을 수 있다”면서 “쉼표나 띄어쓰기를 도입해 단어를 분리하면 이런 실수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치호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초창기 한국 선교사들이 쓰기 시작한 한글책 때문으로 추정된다.

윤치호는 “선교사가 쓴 책이나 (앞으로) 쓸 수 있는 책에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창조적 사고에서 나온 완전히 새로운 단어나 구절, 문장이 들어 있는데 이건 한국인에게 전혀 의미가 없을 수 있고 이런 글에 교훈을 담아봐야 전혀 읽을 수도 없다”고 꼬집었다.

한글이 서툰 선교사들이 쓴 한글책에 쉼표와 띄어쓰기라도 도입해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지적을 한 셈이었다.

윤치호가 1896년 1월 '코리언 리포지토리'에 쓴 '콤마, 혹은 스페이싱' 전문. 옥성득 미국 UCLA 교수가 윤치호가 쓴 글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옥 교수 제공

한글 띄어쓰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구체적 제안이 알려진 건 ‘T.H.Y.’라는 필명의 주인이 윤치호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윤치호는 이 글의 맨 마지막에 필명만 남겨 뒀다.

옥 교수는 8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T.H.Y.’는 ‘Tchi Ho Yun’의 약자다. 생전 윤치호는 자신의 이름 약자가 외국인들이 발음하는 데 편하다 보니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면서 “영어 단어 ‘Thy(당신)’를 염두에 둔 표기법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옛 영문 주기도문은 ‘당신’이라는 표현을 모두 ‘Thy’로 사용한만큼 미국 신앙인들 사이에서 친숙한 표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옥 교수는 “윤치호 이전에 자신의 글에서 띄어쓰기를 일부 인용했던 로스 선교사 등을 ‘한글 띄어쓰기’ 실험자로 본다면 윤치호는 첫 도입자, 그가 제작에 참여한 ‘독립신문’은 시행자로 봐야 한다”면서 “1896년 4월 창간한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띄어쓰기를 전격 도입한 건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로 ‘혁명적인 한글 시대’를 여는 촉매제가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듬해인 1897년 2월 H.G. 아펜젤러가 창간한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H.G. 언더우드가 편집한 ‘그리스도신문’이 띄어쓰기를 수용했다”면서 “결국 기독교인들이 한글 확산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옥 교수는 “윤치호는 1897년 ‘아래 아(·)’를 쓰지 말자는 개혁 철자법도 제안했다”면서 “선교사와 기독교 지식인을 중심으로 진행된 19세기 말 한글 혁명에 대한 관심이 커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때 고위 관직자였던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회가 한국 선교를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1895년 윤치호는 사업가였던 이건혁을 통해 미국 남감리회에 한국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미국 남감리회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C. 리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윤치호는 리드 선교사와 고양읍교회를 설립한 뒤 서울에도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미국의 선교 본부에 지속적으로 부지 제공을 요청했다. 그 결과 미국 남감리회는 서울 중심부에 부지를 마련했고 이 곳에 J. 캠벨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지금의 종교교회(전창희 목사)다.

장창일 박윤서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