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로 눈을 가리고 오로지 후각, 촉각, 미각에만 의존해 음식을 평가한다. 주방에 서면 지금까지 쌓아온 배경은 모두 사라지고 재료와 셰프의 손, 평가자의 입만 남는다. 셰프들은 자신 앞에 주어진 재료로 최선을 다해 땀 흘리며 경쟁자와 싸운다. 그 결과에는 “이번엔 상대가 잘했다”며 깨끗하게 승복한다. 요리 서바이벌이지만 한편의 무협지를 보는 듯하다.
넷플릭스 코리아의 첫 요리 서바이벌인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 얘기다. 음식에 대한 셰프들의 순수한 열정과 거대한 세트장 규모 그리고 빠른 전개가 한데 어우러진 ‘흑백요리사’는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흑백요리사’는 지난달 23일부터 29일까지 490만 시청수(시청 시간을 작품의 총 러닝 타임으로 나눈 값)를 기록하며, 지난달 17일 공개 이후 2주 연속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를 기록했다.
100인의 셰프 중 최후의 1인이 탄생할 마지막 두 회차의 공개를 앞둔 7일 서울 마포구 호텔 나루 서울 엠갤러리에선 ‘흑백요리사’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엔 김학민, 김은지 PD와 톱8 셰프들이 참석했다. 김은지 PD는 “이 정도로 큰 사랑을 주실 줄 몰라서 제작진 모두 감사한 마음”이라며 “100인의 세프들 매장 예약률이 급증하고 많은 분이 찾아주고 계신다더라. 한국 요식업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간 수많은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흑백요리사’는 셰프들의 요리 과정과 심사위원 두 사람(백종원, 안성재)의 평가에만 몰두한다. 최현석 셰프는 “많은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했지만 ‘흑백요리사’는 예능은 신경 쓰지 않고 요리에만 집중해서 좋았다”고 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 선 지적과 평가 대신 요식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백종원과 국내 유일의 미슐랭 3스타 셰프 안성재가 가차 없이 ‘탈락’을 외치면서도 셰프들의 음식에 존경을 표하는 것도 다른 점이다.
이 같은 ‘흑백요리사’의 강점은 제작진의 영리한 라운드별 미션 설계를 만나 빛을 발했다. 무작위로 선정된 재료로 흑수저와 백수저 셰프가 1대 1로 겨루는 것부터 흑백 팀전, 흑백 혼합 팀전 레스토랑 미션, 편의점 재료 활용, 자신의 인생을 담은 음식 만들기까지. 어느 것 하나 뻔한 미션이 없었다. 김은지 PD는 “각각의 미션 안에 다양한 맛의 주제를 녹이려 했다”며 “2라운드는 주재료를 잘 살리는 맛, 3라운드는 대량 요리를 해도 맛있고 대중이 선호하는 맛, 4라운드는 가격에 합당하고 (소비자가) 사고 싶은 맛 등을 주제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위에 열거한 다양한 이유가 ‘흑백요리사’를 매력적으로 만들었지만, 시청자들이 가장 열광하는 지점은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요리로만 맞붙는 셰프들의 태도다.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백수저 셰프들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모든 미션에 치열하게 임한다. 미국 백악관 국빈 만찬 셰프인 에드워드 리는 “나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증명하겠다”고 말한다.
이날 정지선 셰프는 “(‘흑백요리사’에) 나와서 열심히 싸우면 직원들에게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매장을 벗어나 새로운 주제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맛으로는 최고라 평가받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 셰프들은 백수저 세프들을 ‘제끼겠다’며 열의를 불태우면서도 그들에 대한 존경을 잊지 않는다. ‘흑백요리사’의 서사는 단순한 언더독의 반란도, 무자비한 권력자의 승리도 아니다.
‘흑백요리사’는 이제 최후의 1인 발표만을 남겨뒀다. 김은지 PD는 “마지막 미션인 ‘무한요리지옥’은 창의성의 한계를 시험하는 미션”이라며 “가장 치열한 개인전이 펼쳐지는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가 될 예정”이라고 기대를 당부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