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러닝이 유행이지요. ‘초보 러너를 위한 페이스 조절법’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목표 설정→체감 강도 이해→호흡 조절→기술 사용→점진적 증가→페이스 분할→회복과 휴식 순으로 돼 있었습니다. 그중에 호흡 조절이 중요한데요. ‘호흡이 가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페이스를 찾으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안정적 페이스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여유를 가지면서 뛰어야 할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풍경 사진 하나를 올려드립니다. 최근 우면산 둘레길을 걸으며 발견한 남산과 북한산 동시 조망입니다. 이번 주도 ‘저 높은 하늘과 산과 바다를 지으신’ 우리 주님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칼케돈공의회,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진정한 인간이시다” 선언
451년 10월 8일 칼케돈공의회가 열려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사 유티케스의 이론을 다루게 됩니다. 유티케스는 “구세주는 성부와는 동일한 본질이시지만 우리들과는 동일한 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플라비안은 유티케스의 주장이 가현설(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살 때 가졌던 육체는 진짜 육체가 아니라 육체처럼 보였다고 주장하고, 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 몸을 떠났다고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이단 교리)에 가깝다고 판단해 그를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신성이 ‘바다의 포도주 한 방울처럼’ 그의 인성을 삼켰다고 믿었습니다. 공의회는 이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후 기독론에서 가장 높은 단어로 여겨지는 신앙고백을 만들었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우리들은 한 목소리로 성스러운 교부들의 뒤를 좇아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하고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니, 그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진정한 하나님이시요 진정한 인간이시고, 지성과 아울러 육체를 소유하셨으며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시요,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들과 동일한 본질이시요, 모든 면에서 우리들과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고, 그의 신성은 일체의 시간 이전에 성부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으며 그의 신성으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잉태자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 이야말로 유일하시고 동일하신 그리스도요, 성자시요 주시요 독생자이시니, 추호의 혼란이나 변화나 분리나 분열없이 두 본성으로 나타나셨다. 이러한 통일은 서로 다른 두 본성의 구분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양쪽의 속성이 보존되어 양자는 한 위격과 본체 속에서 연합되었다. 이들은 두 위격으로 분리되지 않고 유일하신 독생자, 하나님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이 신앙의 정의는 곧 서방 교회 전체에서 기독론의 정통 신학을 정의하는 표준으로 자리잡습니다. 또 대부분 동방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일부는 배척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상 영속적 분열의 요인이 됐습니다. 주로 시리아와 페르시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사이의 보다 명확한 구별을 주장했으며 이들은 이후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두 개의 성질’ 또는 ‘두 개의 본성’을 부인해 ‘단성론자들’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별세
1747년 10월 9일 뉴잉글랜드의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29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조너선 에드워즈가 발간한 그의 일기는 ‘현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를 비롯해 수백 명이 선교사가 되는 데 영감을 주었습니다.찰스 피니, 구원 문제 해결을 위해 숲으로 들어가다
1821년 10월 10일 29세의 법대생 찰스 피니가 영혼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 근처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날 밤, 그는 ‘온몸에 액체 같은 사랑의 물결’로 가득 찬 극적인 회심을 경험합니다. 피니는 이후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부흥사 중 한 명이 되었고 50만명 넘는 사람들이 회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울리히 츠빙글리, 전투에서 사망하다
1531년 10월 11일 스위스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츠빙글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스위스 연방의 종교개혁 완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1차 카펠 평화조약에 따르면 가톨릭 주들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를 허용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5개 가톨릭 주는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이행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 진영과 대립했습니다.이에 츠빙글리는 5개 주에 대한 전면적 무장공격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을 프로테스탄트 주들이 수용하면서 1531년 10월 9일 취리히에 공식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10월 11일 3500명의 취리히 병사들은 카펠 부근에서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가톨릭 주 병사들과 교전했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전투는 종결됐습니다. 이 전투로 25명의 성직자를 포함한 500명의 취리히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100여명의 가톨릭 병사들이 전사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츠빙글리 전사 후 그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는 츠빙글리를 추앙하면서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츠빙글리에게 전쟁은 신앙의 자유와 부조리한 용병제도의 철폐를 위한, 더 나아가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 이념에 기초한 봉건적 체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취한, 불가피한 물리적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칼뱅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 별세
1605년 10월 13일 칼뱅의 후계자이자 스위스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르 베자가 사망합니다. 베자(1519~1605)는 칼뱅의 제자이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그는 칼뱅이 남긴 유산을 체계화해 정통주의 신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칼뱅과 베자는 개신교 신앙을 위해 자신의 고국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길’ 위의 삶을 선택한 망명자였습니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로서 제네바에서 동역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순종하며 주어진 길을 걸어갔습니다. 칼뱅은 개혁교회의 신학적 기반을 닦았고 베자는 칼뱅이 닦은 터 위에서 개혁교회를 단단히 만들어갔습니다.
베자의 임무는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고통받는 프랑스 위그노를 실제로 돕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여하며 발로 뛰었습니다. 외교적 역량이 돋보이는 임무를 통해 그는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 전역을 다니며 실천적 목회를 했습니다.
둘째 예정론 논쟁에 뛰어들어 칼뱅을 후원했고 루터주의자들과의 성찬론 논쟁 등도 주도했습니다. 베자는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의 논쟁에도 집중해 루터파와의 경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논쟁을 통해 개혁신학을 체계화했던 것입니다. 부친을 위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수많은 설교문과 주석서를 남겼습니다.
셋째 베자는 칼뱅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으로서 교육 체계와 커리큘럼을 만드는 데 힘써서 신학교육의 교육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목회자였습니다. 베자는 흑사병으로 제네바 아카데미가 문을 닫았을 때도 제네바 시민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었고 그들 신앙이 바로 설 수 있도록 격려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