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그만두고 뉴욕식물원 정원사로…“정원은 나의 수도원”

입력 2024-10-03 15:00
미국 뉴욕 보태니컬가든(뉴욕식물원)의 정원사인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의 저자는 “매년 색다른 기획 전시를 선보이는 ‘디스플레이 가든’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 잘 주기’”라고 말한다. 사진은 뉴욕식물원 온실 중정 정원 모습. 선율 제공

이 책은 올 초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패트릭 브링리의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와 여러모로 닮았다. 브링리가 유명 주간지 ‘뉴요커’를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 됐다면 저자는 국내 굴지의 IT기업을 다니다 미국 뉴욕 보태니컬가든(NYBG·뉴욕식물원)의 가드너(정원사)로 전직했다. 활동 무대가 세계인이 즐겨 찾는 뉴욕의 명소라는 점도 비슷하다.

결정적 차이는 인생의 행로를 바꾼 이유와 정원 안팎의 식물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저자의 독창적 시각에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후 SK브로드밴드 등에서 15년간 일한 저자는 45세인 2018년 미국 뉴욕주립대(SUNY cobleskill) 식물학·조경개발 전공으로 편입하며 진로를 바꿨다. “모래 여울에서만 사는 물고기 ‘흰수마자’가 사라진 경북 영주의 내성천”과 “불에 덴 오랑우탄이 신음하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에 절망해서다. 강과 산을 벗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낸 저자로서는 “로마서 8장 표현대로 피조물의 탄식이 온몸으로 들리는” 영혼의 고통을 느꼈다.

미국 뉴욕 보태니컬가든(뉴욕식물원) 정원사들이 가을을 맞아 낙엽 제거 작업을 하는 모습. 선율 제공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자연이 훼손된 이들 현장을 가족과 돌아보다 “사람과 자연의 손상된 관계 회복을 위해 살겠다”는 사명을 발견한다. 특히 자녀들을 자연주의 혁신학교인 ‘발리그린스쿨’에 1년여간 보내면서 느낀 바가 컸다. 10여년 전 접수했다 지연됐던 이민 수속이 재개된 것도 추동 요인이 됐다.

‘생태 복원’을 꿈꾸며 조카보다 어린 동기들과 공부를 시작한 저자가 이민 생활 중 자주 돌아본 건 ‘한국교회에서 해온 신앙생활’이다. 큰 누나의 전도로 초등학생 저학년 때 교회에 출석한 그는 30여년 간 교회 3곳을 거쳤다. 군 입대 전까지 다닌 첫 교회는 선교헌금 사용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됐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교회도 목회자 관련 문제로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마지막 교회는 담임 목회자가 돌연 사임하면서 아예 공동체가 공중분해 됐다. ‘분열된 교회’ ‘변질한 교회’ ‘사라진 교회’를 차례로 경험했지만 저자의 신앙생활은 계속 이어졌다. 오히려 “세 곳의 불완전한 지역 교회 체험은 하나의 완전한 보편 교회를 경험하는” 자양분이 됐다.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의 저자는 핑크뮬리 등 그라스류(벼과 식물)를 보며 ‘빛을 포용한 정원 같은 교회’를 떠올린다. 사진은 여러 그라스류로 조성된 미국 뉴욕 보태니컬가든(뉴욕식물원)의 한 정원. 선율 제공

뉴욕 플랜팅필즈수목원을 거쳐 2021년부터 NYBG에 몸담은 저자는 통근길과 근무 중 마주한 식물에서 복음의 의미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단상을 주로 얻었다. 박주가리 씨앗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복음의 유전자를 품고” 세상에 흩뿌려진 성도는 “곧 이 시대 속 선교적 교회”임을 깨닫는다. ‘자연주의 정원’ 유행으로 최근 각광받는 핑크뮬리 등 그라스류 식물(벼과 식물)이 빛을 머금은 걸 바라보며 “각각의 성도가 제 빛깔을 내도록 진리의 빛을 비추는 ‘빛을 포용한 정원 같은 교회’”를 꿈꾼다.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의 저자는 계절마다 심긴 식물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 사진은 미국 뉴욕 보태니컬가든(뉴욕식물원) 자생식물정원 8월 풍경. 선율 제공

잡초와 화초, 야생화를 구분하는 정원의 전통적 개념에선 교회에서 흔히 쓰이는 ‘세상적’이란 표현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생태계와 분리된 정원은 현실과 분리된 종교 생활과도 같다”고 경계한다. ‘정원의 언어’로 교회만 논한 건 아니다. NYBG 온실 중정 정원에 쓰이는 막대한 수돗물 논란을 전하며 온난화 직격탄을 맞은 지구촌 현실도 전한다.


저자의 생생한 표현과 손수 찍은 사진으로 NYBG의 사계를 오롯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계절 순으로 배열돼 ‘환대의 정원’ ‘연결의 정원’ 등의 이름이 붙은 각 장에는 제철을 맞은 식물 관련 이야기가 풍성하다. 책을 덮으면 머리말에 ‘나의 수목원, 나의 수도원’이란 제목을 단 저자처럼 단풍이 물든 자연 가운데 나만의 성소(聖所)를 찾고픈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