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처럼 뇌전증 앓는 아이와 가정 위한 배우 김예랑의 기도

입력 2024-09-24 08:00
배우 김예랑(왼쪽에서 두 번째)씨가 가족들과 함께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첫째 딸 서원, 김씨, 막내 아들 우원, 남편 김진무씨, 둘째 딸 려원. 김씨 제공

KBS 드라마 ‘솔약국 집 아들들’(2009)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배우 김예랑(43·성복순복음교회 성도)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이른바 ‘떡볶이 사건’이다. 그의 둘째 딸 려원이는 태어난 지 33개월이 되던 2018년 뇌전증을 진단받았다. 병원에 입원해 힘든 검사와 치료를 병행하는 려원이를 보며 김씨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기도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케톤 식이요법’이라는 식단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려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이고 싶었다.

“려원이를 데리고 병원 예배실에서 ‘병을 고쳐달라는 것도 아니고, 떡볶이만 한 번 먹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순간 려원이가 경기를 하며 쓰러지더라고요. 머릿속에서 뭔가 탁 끊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태어나 처음으로 십자가를 노려봤죠.”

지난 19일 경기도 용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씨가 지난 19일 경기도 용인의 한 카페에서 화이팅게일 사역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임보혁 기자

욕까지 퍼부으며 려원이를 데리고 예배실을 나섰지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결국, 붙잡고 따질 곳도 의지할 곳도 하나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하던 그녀에게 하나님은 “너는 왜 네 딸을 위해서만 기도하니”라고 물으셨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내 이해가 된 그녀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다. 그제야 려원이처럼 아픈 같은 병동의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며 다가갔다. 려원이도 링거를 꽂은 채 함께 병실을 돌아다니며 기도해줬다. 려원이의 뇌수술을 앞두고 려원이를 위한 기도 모임이 생겼다. 이는 소아 뇌전증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중보기도자들이 모인 ‘화이팅게일’ 공동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엄마들이 건강하고 괜찮아져야 아이들을 계속 책임지고 돌볼 수 있어요. 중보기도를 려원이 뿐만 아니라 려원이처럼 아픈 아이들과 그를 돌보는 모든 엄마와 함께 나누면 어떻겠냐는 친구의 제안에 저도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 싶었죠.”
화이팅게일 활동 모습. 김씨 제공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려원이는 입원한 지 80일 만에 퇴원했다. 김씨는 기뻤지만, 머릿속 한쪽에 ‘왜 우리 애만 고쳐주셨지’라는 질문이 맴돌며 마음이 무거웠다. 그 질문의 답은 15개월 후 려원이의 병이 재발하며 이내 알게 됐다. 병원에서 만나 언니 동생 사이가 된 한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불교 신자인 그 동생은 뇌수술을 앞둔 려원이를 위해 기도해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려원이 보다 그녀의 아이가 더 아픈 걸 알기에 김씨는 울음을 쏟아내며 “그동안 기도를 잘 못 알려줬다”며 사과했다. 만약 수술이 잘 안 되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며, 우리 아이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예수 믿어서 천국 가게 해달라는 기도라고 일러줬다.

김씨는 “그때 그 동생이 처음으로 알았다며 하나님을 믿어보겠다고 하더라”며 “려원이의 경기가 멎었던 그때는 주님을 못 믿겠다던 그 동생이 오히려 려원이가 재발해서 다시 입원하고 뇌수술을 앞두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후 그 동생은 손목에 찬 염주도 빼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을 가진 하은이로 이름도 바꿨다.

그는 늘 말한다. 아이가 아픈 건 아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며, 아이가 낫는 것만이 하나님 축복의 증거는 아니라고. 중요한 건 투병 과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것임을 믿는다.
려원이가 예수님 모양의 인형을 안고 잠든 모습. 김씨 제공

김씨가 2022년 남편 김진무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마인드유니버스’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영화에 출연한 김씨도 덕분에 레드카펫을 밟아보며 오랜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날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집에 와서 씻는데 문득 ‘우물가 여인처럼’이란 찬양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그 가사처럼 비록 이 땅에 발을 디디고 힘들게 살지만, 우물가의 여인처럼 헛된 것을 구하며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삶이 아닌,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저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됐으면 합니다.”

화이팅게일은 기도 모임뿐 아니라 소아 뇌전증·중증질환 아동과 그 가정을 위한 인식개선 캠페인도 펼치고, 온라인 찬양공연 등도 연다. 올해는 절친한 배우 최설화의 제안으로 시작된 ‘예술로 기획 사업’에도 참여했다. 외출이 어려운 중증 소아 뇌전증 환아 가정에 문화·예술 활동을 누릴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의 장애 인식 개선도 꾀하는 사업이다. 김씨는 이런 기회를 통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예술인에게도 자연스레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갈 것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려원이의 경련이 재발해 뇌전증 투병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김씨는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을 더 믿게 됐다”고 했다. 화이팅게일을 통해 만나는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 삶을 통해 “광야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오아시스를, 예수님의 사랑을 매일 마주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김씨 가족사진. 김씨 제공

모태 신앙인으로서 중3 때 간 호주 유학길에서 가정형편 탓에 다시 돌아왔을 때도, 공채탤런트에 합격해 배우의 길을 들어섰을 때도, 그리고 려원이가 아팠을 때도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구하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다.

“배우이다 보니 저도 요즘 사람처럼 어떻게 하면 더 높은 곳에 오를까 하는 마음도 들어요. 그런 면에서 화이팅게일 아이들은 마치 종이가 날아가지 않도록 얹는 서진(書鎭)처럼 제 마음을 붙잡아주는 마음의 주춧돌 같아요. 화이팅게일의 중보자로 섬기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거룩하고 선하다고 착각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경계합니다. 화이팅게일을 특정 개인이나 기업에 속한 단체가 아니라, 누구나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곳, 아프고 지쳐 목마르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그 세상 속으로 예수 사랑이 흘러가게 하는 곳이길 기도합니다.”

용인=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