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숙 작가의 교인 풍경-6] 서로 연결된 하나님 이미지, 부모님 이미지, 그리고 내 이미지

입력 2024-09-20 00:05
게티이미지뱅크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S 집사님은 둘째를 임신했습니다. 첫째 딸이 초등학교 3학년인데, 집사님 말로는 시부모님도 남편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을 원하는 것 같아서 아들을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마음을 다해 기도했는데, 마침내 아들을 주실 거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래서 둘째를 가졌답니다. 아이를 낳으러 가는 날도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성전 강대상 위에 감사헌금까지 드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과연 S 집사님은 아들을 낳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딸을 낳았는데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문제까지 생겼어요. 뭐냐면 ‘딸은 필요 없다’라는 환청이 계속 들릴 뿐만 아니라 자신이 딸을 죽일 것 같은 마음에 도저히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아이는 지방에 계시는 시부모님댁으로 보내어졌고 얼마 후에 집사님은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상담 중에 “어린 시절 아버지를 생각하면 뭐가 떠오르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집사님은 오열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어서 눈이 빨갛게 퉁퉁 부은 집사님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셨어요.

S 집사님은 1남 4녀 중 막내였다고 해요. 식사 시간이면 아버지는 늘 김을 구워서 나누어주었는데 아들에게는 김 한 장을 통째로 주었습니다. 딸들에게는 구운 김 1장을 4등분을 해서 나누어주었는데 4분의 1을 주는 것조차 못마땅했는지 ‘딸은 필요 없다’라는 말을 꼭 덧붙이면서 주었다고 합니다.

집사님을 괴롭혔던 퍼즐 조각들이 이제야 맞춰졌고 집사님은 비로소 자신이 왜 이런 모습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시부모님도 남편도 ‘아들, 아들’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아들을 원한다고 느낀 건 순전히 자신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은 필요 없다’라는 환청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눌러 두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왠지 하나님 아니 교회 목사님조차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 것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가 영향을 주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목사님을 비딱하게 바라보았던 것에 대해 미안함과 죄책감이 몰려왔습니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깊이 억눌러둔 마음의 상처들은 현재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상처를 준 사람이 육신의 아버지였다면 이런 경험이 하나님 이미지에까지 투영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으로 비유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갓 태어난 아기가 인간관계에서 처음으로 맺는 관계인 엄마와의 관계처럼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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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하나님’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요. 어떤 사람은 늘 자신이 뭘 하는지 CCTV로 촬영하는 ‘감시자’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책임을 묻기 때문이랍니다. 혹은 ‘딱 필요한 그만큼만 주시는 인색한 하나님 이미지’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베풀면 내가 베푼 것보다 그 이상으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가진 분도 있고 그런 베푸는 행동과 상관없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필요로 하는 걸 다 알고 채워주시는 사랑 많고 인자한 하나님 이미지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가졌던 이미지를 그대로 하나님께 투사한다

정녕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한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사람마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이유는 뭘까요.

애너 마리아 리주토(Ana-Maria-Rizzuto)에 의하면 하나님 이미지는 육신의 부모님 이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가졌던 이미지를 그대로 하나님께 투사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늘 잘못을 지적받고 혼나는 것이 무서워서 기죽어 지냈다면 그 이미지가 하나님께 그대로 투사될 수 있습니다. 앞의 사례를 예로 들면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딸은 필요 없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S 집사님은 성인이 되어 교회 일을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 심지어는 목사님께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꼈는데, 이것이야말로 S 집사님이 부모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하나님께 투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부모님의 이미지는 나 자신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엄하고 무서운 부모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이미지, 부모님 이미지, 자기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지요.

그런 연유로 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먼저 육신의 부모님에 대해 가진 이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원인을 찾아보아서 꼬이고 얽힌 마음을 풀어야겠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은 ‘부모님’ 그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면 나의 어머니 혹은 나의 아버지는 무엇을 하실지 상상해보는 것도 부모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됩니다.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파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이니까 마음이 따뜻해지겠죠. 하지만 좀 냉정한 모습의 부모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그와 비슷한 하나님 이미지를 가지게 될 테니까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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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의 부모님 이미지

니체의 경우, 어린 시절의 부모님 경험 즉 부모님 이미지가 좀 독특하게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되었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철학자 니체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루드비히 니체 목사는 니체가 5살 무렵인 1849년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니체가 쓴 글들을 보면 병든 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하나님 이미지와 연결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니체가 하나님과 기독교를 거부한 건 사실 병든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만행도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고 하죠. 그러니까 히틀러의 어머니는 히틀러가 어렸을 때 바람을 피웠는데 함께 바람난 남자가 유대인이었고, 히틀러의 아버지는 엄청 폭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갖게 된 유대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대량학살로 이어진 겁니다. 혹 부모님 이미지가 실제 부모님의 모습과는 다를지라도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는 자녀들의 삶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온전히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된 하나님 이미지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미지가 바뀌기 위해서는 육신의 부모님 이미지에 얽힌 마음의 상처들을 풀어내야 하고요.

S 집사님의 사례에서처럼 육신의 부모님께 받은 마음의 상처가 떠오른다면 늦었지만, 그 마음을 풀어내면 좋겠습니다. 직접 대면하여 말로 하기 어려우면 글로 써보는 건 어떨까요.


글=강현숙 작가, 치매돌봄 전문가, ‘오십의 마음 사전’(유노책주) ‘치매지만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생명의말씀사) 저자

편집=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