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古來)로부터 병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이들은 그 직무 특성상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했다. 여기서 ‘사명감’이 아니라 ‘소명의식’이라고 말한 이유는 전자가 주로 인간에 대한 책임감을 뜻하는 반면 후자는 신(神)에 대한 경외심이 수반된 책임의식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근대화와 세속화의 격랑이 몰아치기 전까지 의료인의 직임은 단지 인간적 선의만이 아니라 종교적 박애와 자비를 실천하는 고결한 책무로 여겨졌다.
일례로 고려조 한반도에서는 의원이 되기 위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하나는 국가고시를 통해 나라에 봉직하는 의원이 되는 길, 다른 하나는 사찰에 속한 전문 의료집단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고 의승(醫僧)이 되는 길이었다. 개경 도성 이외의 지역에서 고려 민중이 실질적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바로 이 의승들의 활동이었다. 이들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병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목격된다. 서구 기독교회 역시 의료인 집단을 양성해 병자들의 구제에 나섰다. 중세 후기에 의학교육이 대학을 중심으로 전문화되기 전까지는 유럽의 의사와 약제사 대부분이 수도원에서 의학을 배운 성직자들이었으며 수도원은 해당 지역의 병원 역할을 담당했다. 이 성직자 의료인들은 통상 병자들을 무상으로 돌봤다. 의료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널리 전파하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기독교회의 의료선교 전통을 굳게 뒷받침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의사는 이전 시대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사명감’을 가질 것을 요구받는다. 현대의 의사들은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을 바탕으로 본연의 합리적 도덕성에 따라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고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의사들에게 수여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경제적 보상과 명예는 바로 이런 고결한 책임을 짊어진 데 대한 보상이다. 이런 관행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고용-피고용 관계를 지탱하는 임금과 노동의 교환계약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면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의사들이 짊어지는 특별한 도덕적, 사회적 책임은 과거 의료인들이 가졌던 종교적 소명이 현대적인 형태로 갱신된 것인 동시에 천부인권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적 의무가 의사들에게 부과된 것이기도 하다. 냉혹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직접 다루는 직임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자본의 논리를 적용하는 데 예외를 두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이다. 즉 의사들은 다른 임금노동자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직무능력과 도덕성을 갖출 책임을 짊어지는 대신 여타 사회구성원들은 의사들이 일반적인 지식노동자들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적 보상과 명예를 보장받는 것을 타당한 일로 여긴다. 역사상 이런 공감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사회체제는 오로지 공산주의뿐이다. 결과의 평등을 강요하고 인간을 생물학적 기계장치로 환원해버리는 공산주의 유물론 사회에서 의사란 푸줏간의 정육업자나 제재소의 목수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단순 기술자 취급을 받았다. 지금도 구소련에 속했던 지역에서는 이런 인식이 남아있어 의사들이 받는 사회적 대우나 경제적 보상이 상대적으로 크게 낮은 편이다.
최근 격화되고 있는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 사태를 들여다보면 의사들이 맡은 직임에 대한 사명과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의 원칙이 양측 집단 모두에 의해 부정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전공의 파업 비율이 68.8%, 전임의는 28.1%에 이르는 가운데 다수의 중대형 병원 응급실에는 환자를 돌볼 의료진이 없어 응급환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고 여러 대학병원들은 진료와 치료가 중단돼 재정악화로 인한 파산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사태의 단초는 분명 정부가 먼저 제공했다. 의료계와 충분히 협상하고 타협하는 과정 없이 독단적으로 의대정원을 늘린 처사가 이번 의료대란의 발단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가 제시한 의료개혁의 취지는 충분히 인정될만 하다.
인구절벽과 초고령화 그리고 지방소멸의 위기를 앞두고 의료인력이 잘 수급되지 않는 비인기 필수과목의 인력을 시급하게 충원해야 할 필요성은 국민 대다수가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의료개혁 시행의 절차와 방법에 있다. 윤석열 정부는 의료계의 전체 인력구조를 어떻게 적절히 개편할지, 병원들의 경영 및 운영 방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지, 그리고 여기에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지 면밀하게 계획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우선 의대정원을 늘리는 것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했다. 소위 ‘사람을 갈아넣는’ 구시대적 대안만 내놓는 정부의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태도에 의료계가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정부 담당자들이 협상과 타협이라는 정치적 기량을 발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의료계를 상대로 권위적, 강압적 자세로 일관한 데 따른 직무유기의 소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료계의 대응방식 역시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의료계가 정부의 권위주의적이고 행정편의주의적인 태도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방안이 겨우 생디칼리즘(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파업이나 태업 등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을 통해 노동자 복지를 개선하고 사회적 변화를 유도하는 노동운동 노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사회 최고의 전문가집단 중 하나라는 의료계가 금속노조가 보일법한 행동양식을 따라하는 촌극에 국민들은 당혹감과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에 수립된 지난 세 번의 진보정권 시절,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이루어진 사회인식 변화가 초래한 결과가 분명하다.
파업에 동참한 의사들은 자신들에 비해 낮은 수준의 사회적 지위와 편익을 누리는 비전문 노동자 직군의 권리증진 전략을 채택한 것이 도리어 그들 의사들이 맡은 고결한 직임을 스스로 격하시킨 선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다. 의사들은 비전문 인력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높은 수준의 인맥과 학맥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의료계는 굳이 쟁의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정계와 관계(官界)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상신할 역량이 있고 언론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할 역량 또한 갖추고 있다.
일례로 의료계는 이번 정부 의료개혁안의 이면에 숨겨진 부차적인 의도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 혜택을 누리는 기득권층 자제들의 출셋길을 넓히고 싶어하는 은밀한 욕망이 포함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정부안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조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의료계 인사들이 쟁의행위라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사회주의적 대응방식을 택한 것은 분명 커다란 실책이다. 그리고 이 실책 때문에 다수의 환자들이 불편을 겪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응급환자는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많은 이들이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한국 근대의학은 주로 구한말 북미에서 건너온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뿌리내려 기독교의 박애와 생명 존중 정신을 이어받아 발전돼 왔다. 제중원(濟衆院)에서 시작된 한국 의료계의 이 역사적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1980년대부터 2015년까지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과 서울대병원이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정신은 우리 한국 의료계 역사에 깊게 관여돼 있다.
현재 많은 의사들이 동참하고 있는 파업과 태업은 이런 한국 의료계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배경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의료계가 왜 굳이 이런 명분도, 정통성도 없는 대응전략을 택해야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정부가 충분한 계획성과 현실성을 갖춘 의료개혁을 추진하도록 의료계가 현명한 전략을 가지고 설득에 나서 이번 분쟁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방향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 마지않을 따름이다.
◆박욱주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고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좁은문은혜교회 목사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