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사]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입력 2024-09-16 06:00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그의 聖痕
1224년 9월 20일 이날을 전후해 이탈리아의 한적한 알베르니아 산에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주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 즉 당신의 잔인한 정열의 고통을 온전히 경험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하신 그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곧 그의 마음은 기쁨과 연민으로 가득 찼고 손과 발, 옆구리에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는 1226년 죽을 때까지 이 흉터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란 이름은 ‘작은 프랑스인’이란 별명으로 본명은 지오반니(Giovanni)였습니다. 그는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통해 청빈의 생활을 포용했습니다. 어느 날 너무나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친구들은 기쁨의 이유를 묻자 “결혼했다. 빈곤이라는 귀부인과 결혼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상인 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줬고 몸에 넝마를 걸치고 만나는 사람에게 가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예배당을 다시 짓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즐겼습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이런 행태에 분노해 그를 지하실에 가두고 성직자들에게 아들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교는 만약 프란치스코가 자신 가족의 재산을 지혜롭게 사용할 능력이 없다면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는 이 판결을 받자마자 자기 유산을 포기하고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의복마저 벗어 부친에게 준 뒤 벌거벗은 몸으로 숲속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1209년쯤 그는 예수께서 복음서 말씀(마 10:7~10)을 낭송하는 것을 들었고 가난과 설교를 연결할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조용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들어가 이들을 교훈하고 빈자와 병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향 아씨시로 귀환해 주민들에게 설교했으나 이웃과 친구들로부터 모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주변에는 그의 이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새로운 수도회를 시작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수도회가 번영하게 될 때 직면해야 할 여러 유혹을 너무나 잘 알았던 그는 추종자들이 일체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했으며 교황이나 그 누구에게라도 자기들의 기존 규칙을 보다 완화해 줄 것을 요청하기를 금지하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기도문(평화의 기도)이 유명합니다. 교회에서는 성가로 부르기도 했지요.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주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



루터의 독일어 성경 신약 출간
1522년 9월 21일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 초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신구약 완역판은 1534년 184개의 목판화와 함께 출판됐습니다. 독일어 번역판은 과거에도 만들어진 적이 있었지만 루터의 번역은 동시대 언어를 사용했기에 읽기가 쉬웠고 여러 방언으로 흩어져 있던 언어를 표준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최고로 훌륭한 독일어 작품이라고 합니다. 영어판 킹제임스성경(KJV)처럼 루터의 성경은 독일어의 정립을 도와준 문학적인 고전으로 추앙을 받습니다.


1862년 9월 22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앤티탐 전투에서 값비싼 연합군의 승리 후 예비 노예 해방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최종 선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고, 2년 후인 1865년 12월 18일에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는 수정헌법 13조가 의회에서 비준되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