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숙 작가의 교인 풍경-3] 절대적 진리로 상대적인 감정을 판단하지 마세요

입력 2024-09-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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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에 이런 말들이 오갈 때가 있죠. “아니, 201호 있잖아. 시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며느리는 한 번도 찾아가지를 않았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우리 사돈은 요즘이 조선 시대인 줄 아나 봐. 명절이면 아이들을 꼭 이틀씩이나 붙잡아놓는다니까.”, “괜찮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도덕적 윤리적인 기준을 들이대며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교인들도 비슷하게 대화를 이어갑니다. 이를테면 “집사님, 성경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잖아. 그래도 예수 믿는 며느리가 믿지 않는 시어머니를 용서해야지. 용서는 하나님 명령이야.” 혹은 “집사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잖아. 돈 같은 거 걱정하지 말고 맡겨진 일에나 충성해. 하나님이 다 채워주실 거야.” 때로는 이런 식으로 말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고 했잖아. 그까짓 일로 인생 포기한 사람처럼 만날 드러누워 있으면 어떡해. 교회 나와서 기도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얼핏 보면 모두 맞는 말입니다. 왜냐면 성경에 나온 말씀들은 영원무궁토록 변함이 없는 ‘절대적 진리’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이 말씀들을 굳건히 붙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삶의 구심력을 잃지 않고 말씀이 힘이 되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먹구름이 걷혀야 밝은 해를 볼 수 있듯이 먼저 공감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지만, 인간의 감정은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같은 경험을 해도 감정은 서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수술이 잘되어 회복 중인 지인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갔을 때 어떤 사람은 지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기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예전에 부모님이 암으로 고생하셨거나 돌아가신 경험이 떠올라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병문안하러 가서 환자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느끼는 감정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그럴지라도 이들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심리적 현실을 고려해보면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손가락의 지문처럼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성경 말씀이 아무리 절대적 진리일지라도 그 말씀을 들이대며 충고하거나 강요하기 전에, 먼저 그가 느끼는 마음이 어떤 것이든 그걸 알아주고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공감해주면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상대방이 느끼는 부정적 감정의 강도가 낮아지거나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하는 조언이나 충고는 옳은 말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힘든 마음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옳은 말이 오히려 상처를 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에서 ‘집사님, 그러면 안 돼.’라는 표현처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는 식의 충고는 감정이 풀어지기 전에는 들어갈 자리(여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뭔가 상대방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성경 말씀이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충동을 멈추고 먼저 상대방이 고통스럽고 힘든 감정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견해나 가치 즉 평가나 판단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듣고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힘입어 그 감정에서 점점 놓여날 수 있습니다.

비교나 비난, 판단하는 말은 공감의 말이 아니다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70대 후반이신 권사님의 하소연입니다. 이 권사님은 교회 봉고차를 운전하시는 장로님이 밉답니다. 왜냐면 탈 때는 큰길까지 나가서 타지만, 집으로 올 때는 이 권사님이 제일 마지막으로 내리니까 집 앞까지 가주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을 했는데도 장로님은 꼭 큰길가에서 내려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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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 권사님은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권사님의 말을 듣고 A 권사는 “다른 장로님이 운전하실 때는 그렇지 않던데. 얼른 내리셔서 봉고차 문까지 열어주시더라”면서 비교하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권사님은 화를 풀려고 친구 권사에게 얘기한 건데 화를 풀기는커녕 화를 더 키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B 권사는 운전하시는 장로님을 비난하며 “직분이 그냥 명함인 줄 아나 봐. 젊은이도 아니고 나이든 권사인데.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알아서 집 앞까지 태워다 드렸어야 하는 거 아냐”라고 했죠. B 권사도 비난 조의 말을 하면서 불이 난 마음에 부채질을 해버렸습니다.

C 권사는 한술 더 떠서 목사님께 일러바쳐서 집 앞까지 태워다주도록 하라고 그 권사님을 꼬드겼습니다. A, B, C 권사님들이 어떤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닐지라도 이런 말은 공감의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공감’이라는 단어를 오해해서 상대방이 듣고 기분 좋아할 말을 하는 걸 공감이라고 잘못 생각해서 A, B, C 권사님들처럼 비교나 비난 조의 말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진정한 공감이라 할 수 없습니다. ‘화’나 ‘분노’같은 부정적 감정을 더욱 부추길 뿐이지요.

‘그렇구나’, ‘그랬겠네’의 위력을 한번 느껴보시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견해나 가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온전히 귀 기울여줘야 하니까, 굳이 어떤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들으면서 그저 ‘그렇구나’, ‘그랬구나’, 혹은 ‘많이 화가 났겠네’라는 식의 말만 해주어도 좋은 공감이 됩니다. ‘~구나’, ‘~겠네’로 끝나는 표현을 들으면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데, 그래서 당사자는 마음속에 있는 더 깊은 욕구와 관련된 감정들까지 계속해서 표현하게 되고 그러면 마구 타올랐던 감정은 점점 잦아들게 되지요.

그렇게 부정적 감정들이 다 표현되고 나면 마침내 두 사람의 대화는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큰길가에서 내려줄 수밖에 없었던 장로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겠죠. 이를테면 이 권사님을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면 언젠가는 다른 교인들도 알게 되고 그러면 또 다른 불만들이 나올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신 것일 수 있겠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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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절대적 진리가 최고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감정이 하나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성급하게 성경 말씀을 들이대려 합니다. 앞서 언급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이런 표현들은 정말 좋은 말씀이지만 상대방의 감정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마치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권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은 마음이 좀 어떤지를 물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직분자가 주일예배를 빠지면 어떡하냐고 몰아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감정이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들이대는 건 상처만 줄 뿐입니다.

처음에 나온 사례에서 예수 믿는 며느리라도 시어머니에게 얼마든지 화가 날 수도 있고 서운한 마음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낼 수도 있을 겁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조언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우선으로 해야 하는 건 며느리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겁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성경 말씀이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랬구나, 나 같으면 집사님보다 더했을 거야….’ 라며 잘 듣고 공감의 말을 하면서 대화가 끝나갈 즈음에 뭐 도와줄 건 없는지 아니면 언제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약속을 잡은 뒤, 그다음에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라는 말씀을 소개해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은 ‘그렇구나’, ‘그랬구나’의 위력을 한 번 확인해보심 어떨까요.


글=강현숙 작가, 치매돌봄 전문가, ‘오십의 마음 사전’(유노책주) ‘치매지만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생명의말씀사) 저자

편집=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