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턴가 개신교회는 세상 사람에게 타매(唾罵)의 대상이 된 듯해요. 전래 이후 계몽의 주체였던 개신교회가 이제는 계몽의 객체로 전락한 듯해요.… 부도덕한 교역자의 이런저런 일탈 행위가 발각돼도 이들은 끄떡하지도 않죠.”
김기석 청파교회 원로목사의 신간 ‘그대는 한 송이 꽃’(꽃자리)에 실린 대화 한 토막이다. 부평초처럼 세파에 떠밀려 진리와 멀어지는 한국교회 현실에 가슴 저민 저자는 교회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다 목회자로서 느낀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일생을 걸고 붙잡으려던 진실은 가뭇없이 멀어져가는 것만 같은” 데다 비대해진 한국교회는 “머리 둘 곳 하나 없음에도 모두를 품던 예수의 품을 잃고” 있다.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허용하는” 일부 교단 총회의 결정이 세간의 뭇매를 맞는 걸 보면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이런 결정을 보며 기뻐하실까요”라고 되묻는다.
책은 저자가 가족과 성도, 동료 선후배 목회자와 각각의 주제로 나눈 12편의 대화와 11편의 편지로 구성됐다. 대화 상대나 편지 수신인이 뚜렷한 것도 있으나 대체로 그 대상이 명확지 않다. 분명한 건 이들 대화와 편지에서 한국교회와 사회, 불안정한 세계 정세를 향한 절박한 심경이 묻어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글이 비판 일변도로 흐르지 않는 건 ‘소통의 세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예수의 삶과 정신에 저자가 희망을 두기 때문이다.
책 속 대화와 편지의 기저엔 실제 우리 사회의 현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작금의 교회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청년에게 저자는 미국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책 ‘페인트로 얼룩진 새’ 일부를 들려준다. 주인공인 새 장수 레흐는 까마귀를 잡아 알록달록한 페인트를 칠한 뒤 풀어주는 악취미가 있다. 이때마다 까마귀 떼는 해당 새를 일시에 공격해 죽여버렸다. 까마귀 떼는 ‘색칠된 새’를 구별할 눈은 있었으나 동료로 받아줄 품은 없었다. 저자의 말이다. “예수는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사셨어요.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인습적 경계선을 그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넘나드셨지요.… 획일화된 말, 계율적인 말, 일사불란한 말이 횡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를 침묵시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소외를 심화시키는 국내외 정세에 대한 성찰도 담겼다. 입장이 다른 사람을 모욕하며 지배 욕망을 정당화하는 정치인을 향해서는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된다”며 “용서와 사랑과 포용, 나눔이 아니고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또 “돌처럼 굳은 마음은 세상의 아픔에 예민하지 않다.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타락한 영혼의 징표”라고 꼬집는다.
삶의 의미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주변의 ‘관계’에서 찾아볼 것을 권하는 조언도 인상 깊다. 작가이자 비행기 조종사인 생텍쥐페리는 저서 ‘인간의 대지’에서 사막 한복판에 추락했음에도 구원의 여망(餘望)을 버리지 않은 이유로 아내와 친구들을 꼽는다. “조난자는 내가 아닌 나의 생환을 기다리는 이들”이란 이유에서다. 저자는 “우리가 허무의 심연으로 떠내려가지 않는 건 언제나 곁에 ‘너’가 있기 때문”이라며 “결국 생에 대한 결정권은 나만의 것일 수 없다”고 당부한다.
“역사의 주인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며 기독교인이 ‘역사적 지성’을 갖출 것도 강조한다. 그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의 못난 눈물의 역사를 직시할 때 그 참담한 부끄러움의 재 속에서 새로운 정신이 움터 나온다”고 말한다. 여기에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통일 독일 첫 대통령의 1985년 국회 연설도 인용한다. “참회와 속죄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내일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난마처럼 얽힌 시대에 진실한 신앙과 정제된 언어를 추구하는 저자의 시선이 따스하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 “믿는다는 건 삶의 경계선을 넓혀 더 많은 사람과 생명을 품에 안는 것” 등 밑줄 긋고 싶은 문장도 적잖다. “말없이 낮은 자리에 서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게 ‘진리를 굳게 잡은 자’”란 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