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의 한국은 세계은행이 대출을 해줄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절대 채무를 값을 수 없는 나라로 평가받던 한국은 이후 전 세계가 놀랄만한 성장을 이뤘고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롤모델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놀라운 결과들이 남겨졌습니다. 역사 상 최저 출생률을 기록하고 있고, 노인 빈곤율 또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하루에 담배 15개를 피우는 것만큼 해로운 우울증 환자의 비율은 높아져만 가는데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하는 비율은 아주 낮지요.”(김용 세계은행 전 총재)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세계경제의 양대 산맥을 책임지는 세계은행. 이 기관을 이끌었던 김용 세계은행 전 총재가 바라본 한국의 오늘은 이처럼 참혹했다. 그는 세계자살예방의 날(9월 10일)을 앞둔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제3기 국회자살예방포럼 출범식’의 기조강연자로 나섰다. OECD 회원국 내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19년째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의 불명예를 종식시키기 위해 여야 국회의원들과 시민단체, 유관 기관이 힘을 모으고 자살 예방을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선언하는 자리다.
김 전 총재는 “세계은행이 대한민국을 향해 주목하고 있는 지표가 있다”고 했다. 10~30대 사망원인 1위, 70~80대의 자살률, 연간 정신보건 예산. 모두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히는 ‘자살’에 관한 지표들이다. 그는 “한국의 70~80대 자살률은 나치에 의해 강제 수용된 유대인들의 자살률과 비슷하고, 정신보건 예산은 전체 보건 예산의 1.9%에 불과한데 이는 OECD 국가 평균(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라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희망적인 대목도 전했다. 김 전 총재는 “과거 한국의 2배에 달하는 자살률로 고민하던 일본에서도 오늘과 같은 포럼이 출발선에 섰고 다양한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며 “향후 2024년을 돌아봤을 때 ‘한국 사회가 자살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행동에 나선 해’로 기억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자살은 충분히 예방 가능한 것”이라며 “시민사회 구성원, 국회의원, 언론인 등 다양한 주체들이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출범한 제3기 국회자살예방포럼은 공동대표로 김교흥(민주당), 정점식(국민의힘) 의원, 부대표로 임호선 강선우(민주당), 장동혁 정희용(국민의힘) 의원, 간사로 김태선(민주당) 한지아(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중책을 맡아 포럼을 이끈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강호인 외),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공동위원장 김철주, 이봉주) 등 자살예방 시민단체, 언론, 관련 기관 등도 함께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출범식에서는 10~20대로 구성된 자살예방 지킴이 ‘라이키’ 회원 30여명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자살예방염원을 담아 포럼 국회의원들에게 현판을 전달해 눈길을 끌었다.
국회자살예방포럼은 생명존중문화 확산에 이바지하고 자살률을 인구 10만명 당 20명 이하로 낮추기 위한 법·제도 개선, 예산 증액, 자살예방기금 신설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그 첫 번째 활동으로 포럼 출범 이후 즉시, 국회자살예방포럼 회원 23명이 함께하는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개정안에는 법률목적에 ‘누구도 자살로 생명을 잃지 않는 사회의 실현’을 추가하고 자살예방기본계획 수립 의무대상을 시, 군, 구 등 기초지방자치단체까지 확대하며, 자살유발정보의 체계적인 관리, 지방자치단체 내 자살예방센터의 설치 의무화, 공공시설에 대한 자살예방 시설물의 설치 명문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김교흥 공동대표는“자살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사회적 불평등은 불안정성을 키워내고 이는 곧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져 자살이라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며 “국회자살예방포럼에서는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자살예방 및 대응조직이 확충되어, 대국민 자살예방 서비스가 체계적으로 구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정점식 공동대표는“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경제적 문제, 건강 문제 등을 함께 상의하고 지원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연계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를 국회자살예방포럼이 뒷받침하기 위해 자살예방기금을 설치하고, 정부 지원 시스템을 확대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향후 국회자살예방포럼은 연간 4회 이상의 정책세미나 개최를 통해 법·제도 개선, 예산 증액을 도모해나가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살예방사업의 조직, 예산, 인력, 사업 등의 분석 및 평가, 자살 예방에 기여한 이들을 격려하는 ‘국회자살예방대상 시상식’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