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여러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따라잡히고도 여전히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인천 전기차 화재 사고와 관련해 중국산 배터리 여부에 집중하기보다 한국 배터리의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대로 가다간 중국산이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세울 점이 없어질 수도 있다고 FT는 경고했다.
크리스찬 데이비스 FT 서울지국장은 5일 ‘한국이 전기차 화재로부터 배워야 할 진짜 교훈’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중국 기업들은 전기차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초월하거나 맞추거나 빠르게 좁히고 있다”며 “그럼에도 많은 한국인은 중국 경쟁자들이 품질면에서 여전히 경쟁이 안 된다고 위안을 삼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최첨단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데이비스 지국장은 상기시켰다.
“전기차 화재, 단순히 배터리 국적 문제?”
그는 지난달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메르세데스 벤츠 전기차 화재를 언급하며 “한국 배터리가 중국 배터리보다 더 나은 안전 성능을 보인다는 증거는 없다”는 미국 투자은행 번스타인 소속 닐 베버리지 애널리스트의 평가를 전했다.데이비스 지국장은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메르세데스 차량은 중국 배터리 제조업체 ‘파라시스 에너지’가 제조한 니켈·망간·코발트(NMC)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며 “그러나 화재의 실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화재로 23명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차량 40대가 피해를 입은 사실과 함께 전기차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커진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많은 건물이 전기차 주차를 금지하고 전기차 소유자들이 차를 급히 팔기 시작했다”며 “여러 전기차 제조사가 처음으로 배터리 공급자를 공개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필자는 한국 전기차 운전자들이 자신의 차에 탑재된 배터리가 중국산인지 한국산인지 확인하려 했고, 일부 잠재적 구매자들은 중국산 배터리가 장착된 차량을 구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한국 언론 보도를 인용했다.
이번 화재가 배터리 결함 때문인지 아직 확인되지도 않았지만 배터리가 중국산이냐 아니냐가 사태의 본질은 아니라는 게 칼럼을 가로지르는 시각이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일부 관측자들은 한국 배터리 제조사들 역시 전기차 화재와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며 “2021년 LG에너지솔루션은 GM 쉐보레 볼트에 공급한 결함 배터리 때문에 최대 19억 달러(약 2조5397억원)를 지불해야 했다”고 예를 들었다.
전기차값 인하 압박에 한국 배터리 ‘위태’
그는 “한국 미디어가 중국 공장에서 발생하는 스캔들을 열광적으로 전하고 있다”며 “이런 내용이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공유되고 제시되는 방식은 중국 제품이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 한국 제품이 본질적으로 우수하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고 분석했다.배터리를 구성하는 소재가 NMC냐 리튬·인산·철(LFP)이냐 하는 논쟁도 한국에 유리하지 않다고 데이비스 지국장은 지적했다.
한국 배터리 제조사는 비싼 대신 성능이 더 좋은 NMC 배터리 생산에 특화돼 있지만 중국 기업들이 LFP 배터리 성능을 개선하면서 한국 배터리를 선택할 이유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기차 제조사들은 수요 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가격 인하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 중국이 주력으로 생산하는 LFP 배터리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화재가 발생한 벤츠 전기차는 정작 NMC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었다.
데이비스 지국장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가격을 낮추기 위해 점점 더 중국 LFP 배터리를 선택함에 따라 한국 배터리 제조사들은 LFP 배터리 생산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며 “이는 낯선 기술을 채택하고 중국 시장에서 (현지 업체와) 경쟁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의미”라고 해설했다.
그는 “한국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중국 배터리의 안전 기록이 아니라 가격, 품질, 성능에서 한국 제조사가 더 이상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를 더 큰 고민거리로 삼아야 한다”며 “한국 제조사들이 가격뿐만 아니라 품질과 성능에서도 경쟁력을 잃는다면 ‘중국산 아님(Not Made In China)’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