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 월요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완연한 온도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이번 주는 지난주보다 좀 더 시원해진다고 하지요. 더 힘찬 하루, 충만한 일주일 되시길 소망합니다.
9월엔 한국교회 차원에서 대규모 행사들이 연달아 진행됩니다. 우선 4일(수) 오후 7시엔 국민일보가 주최하는 ‘갓플렉스’ 행사가 천안 백석대에서 펼쳐집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이 시간은 ‘잔치공동체’의 찬양과 김선교 선교사의 말씀, 그리고 개그맨 정재형, 래퍼 아넌딜라이트, 한국사 일타강사 전한길 선생님의 간증이 이어집니다. 한국교회 집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갓플렉스는 청년들을 위한 시간입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고 누구나 환영합니다.
9월 22일부터 28일까지는 제4차 국제로잔대회가 열립니다. ‘교회여, 다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를 주제로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개최되며 전 세계 202개국 5000여명이 참가합니다.
국제로잔복음화운동은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인 빌리 그레이엄(1918~2018), 존 스토트(1921~2011) 목사가 복음주의 선교의 동력을 찾고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을 재발견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습니다. 1차(1974년) 스위스 로잔을 시작으로 2차(1989년) 필리핀 마닐라, 3차(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렸습니다. 로잔대회에서 ‘미전도종족 선교’ ‘10/40 창(window)’ 등의 선교 전략이 도출됐지요. 무엇보다 개인구원에만 한정됐던 복음의 정의를 ‘사회 참여’까지도 포괄시켰다는 점에서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와 교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로잔대회는 오늘의 시대 이슈를 중심으로 복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게 됩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또 어떤 중요한 전략이 나올지 자못 기대가 큽니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시각을 선언문에 담을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로잔대회를 전후로 해서 주요 교단의 정기총회도 열립니다. 총회는 교회(특히 장로교회)의 최고 치리 기관이며 의결 기관이지요. 총회는 1년에 한 번씩 정기총회를 열고 교단 전반의 신학과 신앙,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9월 29일부터는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에서 제1회 세계추수정상회의가 열립니다. 회의는 2033년까지 전 세계 10억명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빌리온 소울 하비스트’ 운동의 일환입니다. 100여개국 800명의 대표가 세계추수정상회의에 참가하게 됩니다.
다양한 행사와 국제대회, 교단 정기총회가 은혜롭고 경건하게 마무리되길 바래봅니다.
주일학교를 시작한 로버트 레이크스 출생
1736년 9월 4일 가난한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주일학교(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모임)를 설립한 영국 신문 편집자 로버트 레이크스(R. Raikes)가 글로스터에서 태어납니다. 그가 살던 18세기 영국은 극심한 혼란 상태에 있었습니다.사상적으로는 청교도들에 대한 반동사조가 발생했고 경험주의 사상과 유럽에서 건너온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이신론이 범람했습니다.정치인들은 대외전쟁과 금력정치에 골몰해 사회 불안이 팽배했습니다.이즈음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농촌은 피폐하고 수공업 종사자들은 공장으로 유입됐습니다.고용주는 성인남성 대신 임금이 싼 부녀자나 소년 소녀들을 채용했습니다.실직자와 결손가정이 증가했고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들은 거리를 배회하고 어머니들은 공장으로 일하러 가면서 자녀들은 무방비 상태로 방치됐습니다.
21세부터 잡지사 ‘글루스터 저널’을 운영해온 평신도, 레이크스는 어느 날 슬럼가를 지나다 사회를 탈바꿈시켜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먼저 교도소 개혁에 힘썼습니다.범죄 세계에 들어설 수밖에 없는 죄수들의 계몽에 나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순화교육을 실시했습니다.이 운동을 25년간 진행하던 그는 범죄예방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어린이들을 모아 1780년 주일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옷과 신발을 나눠주고 세수하기, 머리빗기, 싸움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 시간지키기, 어른에게 순종하기 등을 가르쳤습니다.사람들은 큰 호응을 보냈고 후원을 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도 레이크스의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를 중심으로 1785년엔 주일학교협회가 초교파로 결성됐습니다.1785년 25만명이던 주일학교 학생 숫자는 1801년 30만명, 1821년 73만명, 1831년 125만명, 1851년 200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주일학교 운동의 목적은 도덕훈련과 경건교육, 비행 어린이 선도, 근면성 고취였습니다.또 교육 내용은 아기 돌보기, 읽기, 쓰기, 셈하기, 예배와 성서연구, 교리 등이었으며 교육 방법은 일반 학교 교육 방법과 같았습니다.교육제도는 일반학교, 부유층학교, 자선학교 등으로 운영됐습니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인간 존엄성 회복, 평신도 인력 활성화, 학부모의 종교훈련 동기유발, 간접적 산업사회 역군 양성, 자원봉사자 육성, 소외계층 특히 여아에게 교육기회 제공, 기독교교육 방식으로 사회문제 해결, 주일학교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점 등으로 평가됩니다.
주일학교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나 성경교육 중심으로 변화돼 복음 전도를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으로 건너온 주일학교 운동은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신학자이자 선교사, 슈바이처 별세
1965년 9월 4일 독일의 신학자이자 오르간 연주자, 의료 선교사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가봉에서 별세합니다. 슈바이처는 의료 선교사로서 ‘밀림의 성자’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신학자로서도 유명합니다. 20세기 최고 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그는 24세 때인 1899년 철학 박사, 이듬해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0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신학부의 정교수로 근무하며 목회도 병행했습니다.그의 대표적 업적은 예수와 바울 연구에서 나왔으며 18세기부터 이어진 자유주의 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서 연구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서의 문자적 이해가 아니라 비판적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성서 내용 중 이성적으로 설명되는 부분만 선별적으로 수용하다 보니 결국 성서의 권위가 잠식되고 신앙이 부정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표작 ‘역사적 예수의 탐구’(1906)를 통해 슈바이처는 예수를 ‘유대교의 메시아’ 대신 ‘종말론적 사상가’로, 바울을 ‘그리스적 사상가’ 대신 ‘신비주의자’로 파악함으로써 기존 전제를 수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역사적 예수 탐구란 교회의 신앙과 복음서의 기록 이면에 숨겨진 사실적 예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음악 연구에도 열심이었던 슈바이처는 바흐에 관한 저서를 발표하는가 하면 파이프오르간의 제작과 연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슈바이처는 훗날 아프리카에도 피아노를 가져가고 포로수용소에서도 판자를 건반 삼아 연습을 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점차 사라져가는 유럽 각지의 구형 파이프오르간의 보존에도 열심이어서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는 늙은 흑인들을 살리더니 유럽에서는 낡은 파이프오르간을 살리더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슈바이처는 1913년부터 1965년까지 52년 동안 13차례에 걸쳐서 아프리카에 체재하면서 현지인을 치료했습니다. 선교지인 랑바레네(가봉)에 도착하자 백인 의사(훗날 사람들은 슈바이처를 ‘오강가’(주술사)라고 불렀다)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환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말라리아 나병 수면병 이질 침식성종양 등 질환을 다뤘고 폐렴과 심장병 환자가 그토록 많은 데 놀랐다고 합니다. 1957년 부인이 사망하자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머물며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1965년 9월 4일 90세를 일기로 랑바레네에서 사망, 오고웨 강변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美, 하버드대 설립
1636년 9월 8일 매사추세츠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도착한 지 불과 6년 만에 미국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하버드 대학을 설립합니다. 설립 2년 후 이 대학은 미국으로 이민 온 영국 개신교 목사이자 대학 설립에 도움을 준 학식 있는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하버드는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 절반과 서적 전체(400여권)를 신생 대학에 유산으로 남겼습니다.하버드대는 영국의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의 학료(學寮) 제도를 모방한 조직으로 출발, 식민지 시대에는 목사 양성에 필요한 종교교육을 의무화했습니다. 그러나 1869년부터 40년간 학장을 지낸 C W 엘리엇은 독일 유학의 경험을 살려 전문적 학문 연구 기관으로 개혁하고 선택 과목제를 도입했는데 이 제도는 이후 개인지도제 및 전원학료제 실시와 함께 미국 대학 커리큘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