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지성계 ‘문화적 기독교인’ ‘기독교 무신론자’ 목소리 늘고 있다는데…교회가 이들에게 전할 조언은

입력 2024-09-01 17:05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인 더글러스 머레이가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기독교 무신론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프리미어 언빌리버블 유튜브 채널 영상 캡처

‘기독교가 일군 문화와 사회적 가치는 선호하지만 복음은 거부한다.’ 자신을 ‘문화적 기독교인’으로 일컬은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최근 밝힌 입장이다. 최근 서구 지성계에는 도킨스처럼 ‘기독교는 사실에 기반을 둔 종교가 아니지만 사회엔 이롭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영미권 작가 앤디 배니스터는 최근 미국 복음연합(TGC)에 기고한 글 ‘이웃이 기독교 문화를 선호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진 않을 때’에서 이런 추세를 분석했다. 배니스터는 “이제는 자신을 ‘기독교 무신론자’로 칭하는 이들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유명 언론인이자 작가인 더글러스 머레이”라며 “그는 기독교가 인권, 표현의 자유 등 서구 문명의 형성한 기본적 가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가 최근 라디오 방송인 L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문화적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장면. LBC X 캡처

도킨스와 머레이와 함께 제시한 또 다른 사례는 소말리아 출신 미국 작가 아얀 히르시 알리다. 알리는 10대 때 이슬람교에 귀의했으나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무신론자로 돌아서면서 ‘신무신론’(新無神論)의 거두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꾸준히 교류해왔다. 이런 그가 지난해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옹호해 세간에 파문이 일었다. 알리가 생각을 바꾼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서양 문화의 근원에 기독교가 있다는 것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금융·기후 위기가 세계인의 일상을 뒤흔들면서 신무신론에 공허함을 느낀 이들이 ‘기독교 무신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게 배니스터의 분석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등 인생을 향한 기본적 질문에 신무신론이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이런 상황이 기독교에 기회이자 과제를 준다고 봤다. 수년간 ‘모든 악의 근원’으로 조롱받던 기독교가 다시 세간에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기독교는 삶과 사회에 ‘좋은 조언’을 주는 존재에 그쳐선 안 된다고 봤다. 배니스터는 “기독교에서 발흥한 사회적 가치가 결국 복음의 진리에서 나온다는 걸 알려야 한다”며 ‘기독교 무신론자’와의 대화를 위한 조언 3가지를 소개했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첫 번째는 이들 논리의 ‘역설을 지적하는 것’이다. 배니스터는 “기독교 무신론이든 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가치관을 믿을 자유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신앙이 제거되면 그 의미가 사라진다”며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등 인권에 대한 주요 개념은 창세기 1장 내용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사상의 뿌리를 거부하면서도 그 열매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라며 “무신론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도 이를 비꼬는 지적을 한 바 있다”고 말했다. 니체는 자신의 책 ‘우상의 황혼/반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체계이자 함께 생각하는 전체적 관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하나의 주요 개념을 깨뜨리면 전체가 깨진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것은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두 번째는 ‘진실 없이 혜택도 없다’는 전제다. 기독교의 공공선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은 신, 피조물을 위해 죽은 신이 있기에 인간은 평등과 자유, 존엄성과 사랑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움직이는 분자에 불과하다면 기독교는 기껏해야 동화이고 최악의 경우는 망상일 뿐”이다.

‘나니아 연대기’와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 루이스. 국민일보DB

마지막 조언은 ‘묻고 기도하는’ 자세다. 그는 기독교 무신론을 지지하는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 생각의 접근법을 칭찬하라고 권한다. 이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근원에 대해 궁금한지, 혹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근거인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 가치도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배니스터는 “기독교 역사에는 기독교 무신론자 같은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대표적인 예가 ‘나니아 연대기’와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 루이스”라며 “루이스 역시 기독교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그 핵심인 예수를 만났다. 비슷한 여정을 가는 이들을 격려하고 기도하자”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