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같은 선물이었죠” 우리가 미처 몰랐던 로잔의 영향

입력 2024-09-01 14:26 수정 2024-09-02 10:27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1차 로잔대회. 로잔위원회 제공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로잔대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 크리스천의 신앙과 사역에 깊숙이 스며들어 왔다. 한국교회 안에도 ‘로잔의 후예’를 자청하는 많은 사역자와 사역들이 있지만 놀랍게도 로잔대회나 그로 인해 파생한 로잔 운동의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22~28일, 대한민국 인천에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린다. 로잔대회는 한국교회, 특히 복음의 핵심을 강조하는 기독교 운동인 복음주의권 교회에는 ‘올림픽’에 버금가는 자리다. 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이 한국교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조명하고, 그 중요성을 돌아보기 위해 두 명의 복음주의 목회자와 대화를 나눴다.


캠퍼스 학생운동의 대부로 잘 알려진 이승장 목사(전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이 목사 제공

산증인이 전하는 ‘나와 로잔’
캠퍼스 학생운동의 대부로 잘 알려진 이승장(82) 목사(전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는 한국교회에서 로잔 운동의 역사를 몸소 경험한 몇 안 되는 로잔 운동의 산증인이다. 이 목사는 1972년, 트리니티신학교 전도학 교수였던 폴 리틀(Paul E. Little, 1928~1975)과의 만남을 통해 로잔 운동을 처음 접했다. 당시 대학생성경읽기회(UBF)에서 간사로 활동하며 캠퍼스 학생운동을 이끌던 이 목사는, 로잔대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폴 리틀의 수행 비서 역할을 했다. 한경직(1902~2000) 당시 영락교회 목사의 사택에서 폴 리틀과 한 목사 간의 대화에 배석해 로잔 대회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 직접 듣는 기회도 얻었다. 그는 “복음 전도에 전념하던 내게 로잔 운동의 존재는 ‘벼락같은 선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해 봄, 말레이시아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IFES) 수양회에서 만난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2011) 목사도 그에게 로잔 운동과 복음주의에 대한 이해를 더 해줬다. 이 목사는 “책과 설교 테이프를 들으며 흠모하던 존 스토트의 사도행전 강해와 강해 설교 워크숍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며 “이후 성서유니온 대회에 함께 가는 택시 안에서 무려 네 시간 이상 존 스토트와 대화를 나눴다. 이 경험이 나의 이후 사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복음 전도를 사회적 책임으로의 확장하다
이 목사는 로잔 언약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복음 전도에만 치우쳐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로잔 언약 제5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대목을 읽다가 ‘그래, 바로 이거야!’라며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당시 교회와 선교단체는 독재나 사회적 부조리에 담대하게 맞서지 못하고 개인의 구원과 경건 훈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 목사는 이 언약이 복음 전도와 함께 사회 정의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웠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사역을 재정의하게 됐다고 했다.

이 목사뿐 아니라 로잔 대회 이후 여러 교회와 선교단체가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실천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정신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목사는 “교회가 성장과 경영에만 몰두한 결과, 온전한 복음과 총체적 선교라는 로잔의 정신을 실현하기 어려운 현실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한국에 로잔 언약을 소개한 1985년 소리지 표지. 이승장 목사 제공

1985년 소리지에 실린 로잔 언약 제5항에 대한 해설. 이승장 목사 제공

로잔 언약을 소개하고자 했던 이 목사의 열정은 이후 ‘소리’지라는 잡지를 통해 구체화됐다. 그는 1984년 소리라는 무크지를 발간하며 로잔 언약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당시 신군부 독재 시대였던 한국에서는 로잔 언약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목사는 “미국 교회에서 시작된 로잔 대회였지만, 영국과 제3세계 지도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며 소리지를 통해 로잔 언약을 소개하고자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로잔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성서한국 이사장인 구교형 목사는 로잔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해 온 인물이다. 1980년대 대학 시절, 구 목사는 독재 정권 아래에서 기독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구 목사는 “당시 한국 사회에 민주화의 열망이 불타오르던 시기였다”며 “청년들은 신앙을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고 전했다. 구 목사도 이러한 시대적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독재의 억압 속에서 신앙이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지 아니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죠.” 그는 로잔 운동을 통해 ‘총체적 선교’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이 개념은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추구하는 신앙의 방향성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구 목사는 자신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게 됐다.

새로운 인식은 곧바로 그의 사역에도 반영됐다. 구 목사는 신대원을 졸업한 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간사로 활동하며 로잔 정신을 실천했다. 로잔 운동의 가르침은 그를 더욱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이끌었다. 이후 남북나눔운동과 성서한국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며 로잔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남북나눔운동에서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며, 복음의 메시지를 실천하는 데 집중했다. 성서한국에서는 복음주의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이 사회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이 모든 활동이 로잔 운동에서 비롯된 ‘총체적 선교’의 실천이었다.

구교형 성서한국 이사장. 구 이사장 제공

구 목사는 “한국은 세계에 유례없는 로잔 정신에 따른 구체적이고 자생적인 실천 영역과 단체들을 30년째 수없이 만들어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라크 파병, 한반도 평화,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크고 작은 시국 상황마다 복음주의 교회와 단체,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깊이 스며든 로잔 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로잔 운동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친 실질적인 영향력을 설명했다.

4차 로잔대회 향한 기대와 당부
구 목사는 제4차 로잔 대회를 앞두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대한 깊은 고민과 당부를 전했다. 구 목사는 현대 기독교의 위상 변화, 특히 한국에서 ‘개독교’라는 냉소와 가나안 성도의 확산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21세기 문화의 핵심은 소통과 대화인데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불통과 변하지 않는 고집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며 “총체적 복음정신을 표방하며 50년 전 출발한 로잔 운동이 2024년 한국에서 대회를 개최하는만큼 단순히 화려한 잔치판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주제들을 폭넓고 자유롭게 논의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제4차 로잔 대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이번 대회를 섬기는 모든 동역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대회가 주님의 돌보심으로 은혜롭게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다음세대 선교에 교회가 총력을 다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또 “한국교회가 세계를 섬기고 선도할 시대적 과제를 기쁘게 떠맡을 시기가 도래했다고 믿는다”며 “18·19세기 영국과 20세기 미국이 감당했던 역할을 이제 21세기에 한국이 감당해야 한다”며 “한국교회는 훈련된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뿐만 아니라 잘 교육받고 역량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은 나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화를 갖춘 나라로 축복받고 있다”고 했다. 끝으로 “로잔 대회를 계기로 온전한 복음과 총체적 선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영광스러운 사역에 앞장서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축복하며 기도한다”고 덧붙였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