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분의 아이들세상] 판타지 소설에 빠진 청소년, 왜?

입력 2024-08-28 09:05

K는 고등학교 남학생이다. 자신감이 없고 부정적인 생각이 많다. ‘난 안될 거야’ ‘그거 너무 어려워’ ‘친구들은 나보다 잘하겠지’라는 생각에 빠져 있다. 지레 겁을 먹고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놀려도 대응하지 않는다. 그들과 단절한 채, 판타지 소설에만 빠져 지낸다.

K는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 폭언을 들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늘 ‘너는 왜 그것밖에 못하냐’ ‘네가 그렇지 뭘’ ‘멍청한 놈’과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면서 K는 이제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나는 뭐가 잘못된 걸까’ ‘나는 왜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되풀이하게 됐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랑 있으면 지루해하겠지’ 놀림을 받아도 대응하지 못하고 ‘대꾸를 해봤자 날 더 무시하겠지’ ‘어른에게 얘기해도 도와주지는 못할 거야’ ‘난 왜 이렇게 못 난거지’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떨쳐 낼 수가 없다. 물론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그대로 내면화되어 자기 개념이 형성되어 끊임없이 자기를 평가하고 비난하는 거다. 또 아버지는 물론, 친구 관계 모두에서 K는 자신은 약하고 그들은 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K는 판타지 소설의 세계에서는 하늘을 날 수도 있고,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도 있는 전지전능하다는 유능감을 맛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K는 현실 속의 자신이 무력하다는 내면의 생각과 또 판타지 소설 속의 전능함을 극단적으로 오가며 ‘생각’ ‘공상’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생각과 언어를 통해 기술과 문명을 전수하고 사회의 규범과 규칙을 학습한다. 위험을 인지하는 능력으로 인해 서바이벌하고 진화해 왔다. 현실, 상황, 맥락과 유리된 채 생각에 갇혀 있다면 K와 같이 자신을 비교, 평가, 비난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그림자처럼 항상 우리를 따라 다닌다. 그림자가 그런 것처럼 내면의 목소리는 떼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더욱 달라붙어 우리를 괴롭힌다.

‘뜨거운 물은 만지면 안 돼’ ‘우범지대에는 가면 안 돼’ 등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건 해봤자 실패할 거야’ ‘무모하게 해보았다가는 창피만 당할 거야’ ‘난 안될 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새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면 판타지의 세계로 회피해버리기 쉽다. 그래서 도움이 되는 내면의 목소리와 도움이 안 되는 내면의 목소리를 구별해야 한다.

K를 돕기 위해서 먼저 ‘내면의 목소리’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본다. 우리 함께 실험해 보자. 3분 동안 떠오르는 무엇이든 적어 보자. 사소한 것들도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다 보면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바삐 움직이며 쉴새 없이 떠들어대는지 알 수 있다.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이 평가하고 판단, 비교하는지 알 수 있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극소수이며, 불필요한 것들로 분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걸 경험으로 느껴보자.

두 번째로 생각을 실재하는 경험의 세계와 분리하여 보도록 하는 거다. ‘난 의자에서 일어설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의자에서 일어나보는 거다. 생각은 생각일 뿐 아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하도록 하는 거다.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교정하거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고 없애려 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킨다. ‘이런 생각은 너무 부정적이야’ ‘이런 건 비현실적이지’ ‘아버지라면, 친구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을 평가하는 대신, 생각이 ‘그걸 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 그냥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해보는 거다. 의자에서 그냥 일어났던 것처럼.

생각에 사로잡히기보다 생각을 그냥 관찰해보자. 물체를 관찰하듯이. 생각이 올라왔다 사라지는 것을 그냥 바라보자.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라 평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자.

이호분(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