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입력 2024-08-26 05:40 수정 2024-08-26 09:43
굿모닝입니다. 더미션 회원 여러분,

마침내 열대야 행진이 멈추고야 말았습니다. 지난 24일 밤부터 25일 아침 사이 서울의 최저기온이 25도에 미달하면서 34일간 이어지던 ‘서울 열대야’가 ‘일단 멈춤’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다만 낮 최고기온이 33도에 달하는 무더위는 다음 달 초까지 계속될 전망이어서 열대야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폭염 속에서도 비와 소나기가 내린다고 하니 우산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에는 아주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가톨릭 수녀였지만 종교를 초월해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던 마더 테레사는 개신교인들도 많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인물입니다.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생명과 명예와 가족도 버리고 인도 최대 빈민가인 캘커타 주민을 위해 살았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생전에 한국을 세 번 방문했습니다. 첫째는 1981년 5월 당시 서울 동작구 사당3동에 있는 ‘가마니촌’이라고 불리던 판자촌을 방문했습니다.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들을 위로하고 무료탁아소 ‘새싹들의 방’에도 들러 아이들과 어린이날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후 82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분원을 돌아보기 위해 방한했고, 85년에는 판문점 등을 돌아보기 위해 방한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빈민들을 위해 살았다면 세례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번 주는 세계 교회 역사 속에서 전통적으로 세례요한의 별세일이 있는 날입니다. 생각해보면 성경 인물 중에 세례요한처럼 불쌍하고 안타까운 경우도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로서 그분은 반드시 흥하고 자신은 쇠해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성경 전체에서 요한의 이 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지상 최고의 고백이요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높이는 말과 찬송 중에 이보다 더 귀한 고백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그의 죽음은 너무나 원통하고 분하고 안타깝습니다. 분봉왕의 결혼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혔다가 목이 베이다니요. 예수께서도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칭찬하셨지요.(마 11:7~14) 우리가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합니다”를 날마다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 자기애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주님을 높이며 사는 것은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말한 것처럼 그날에 하나님의 도성은 흥할 것이며 자기애의 도성은 망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만 높이는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마더 테레사 출생
1910년 8월 26일 알바니아계 출신 인도 수녀인 마더 테레사가 태어납니다. 테레사 수녀는 1948년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만들어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이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아네즈 곤제 보야지우입니다. 수녀가 되면서 ‘테레사’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은 신앙심이 깊어 주위 사람들을 돕고 살피는 일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알바니아 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 오면 늘 식사와 잠자리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테레사는 18세에 고향을 떠나 아일랜드에 있는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가 3년간 교육을 받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수녀원으로 갔습니다. 캘커타의 성 마리아 수녀원 부속 학교에서 1931년부터 1947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1946년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에서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뒤 수녀회 밖에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는 캘커타 빈민 거리에서 그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오랜 지배로부터 벗어났지만 사회는 불안정하고 거리에는 난민과 병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습니다. 이 옷은 인도의 여인 중에 가장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고 합니다. 테레사는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을 만들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시설도 세웠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만들었습니다.

선교회 규칙은 몸과 마음을 다해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인도 정부와 가톨릭교회도 점차 테레사의 활동을 인정하기 시작해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또한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돌보는 ‘니르말 흐리다이(죽어가는 사람들의 집)’를 세웠습니다. 길거리에서 쓰러지고 버려진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도 소중한 사람이란 걸 처음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한 여인은 “벌레 같던 내가 천사처럼 죽게 되었다”며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또 ‘시슈 브하반(버려진 아이들의 집)’을 지어 부모를 잃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돌봤고 장애인과 노인, 비행 청소년을 돕는 곳도 열었습니다. 1963년에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라는 남성 선교회를 만드는 등 평생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습니다.

24시간 연속 기도회의 시작
1727년 8월 27일 독일 헤른후트에 있는 니콜라우스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모라비안 공동체가 24시간 연쇄 기도(prayer chain)를 시작합니다.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공동체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이 하루 중 매 순간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별세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로마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여 하마 난민을 압도하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열병으로 사망합니다. ‘신국론’을 비롯한 그의 저서들은 기적적으로 반달족의 점령에서도 살아남았고, 그의 신학은 이후 1000년 동안 교회를 세우는 주요 기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신국론’은 방대한 역사사전적 역사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두 개의 도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신국(The City of God)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위에 건축됐고, 지상의 나라는 자기에 대한 사랑 위에 건축됐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 두 개의 도시는 항상 서로 섞여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양자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갈등과 대치 상태, 목숨을 건 싸움이 존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책에서 아무리 강력한 세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결국 노쇠하여 사라질 것이며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의 도시만 굳건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로마제국의 속지인 북아프리카와 로마에서 활동한 신학자이자 성직자, 주교로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와 예정에 관한 이론으로 후대의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참수
29년 8월 29일 5세기부터 전통적으로 세례 요한의 참수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요한은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영주)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 헤롯 필립 2세의 아내인 헤로디아스와 결혼하는 것을 꾸짖은 일로 옥에 갇혔다가 헤로디아스의 딸 살로메가 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청하자 참혹하게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세례 요한의 참수'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마 11:13) 마지막 나실인이었습니다.(눅 1:15~16) 부친은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이며 모친은 아론 가문의 엘리사벳으로, 모두 주의 계명을 흠 없이 지켰던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엘리사벳은 주의 모친 마리아와 친척 간이기도 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는데, 이때 ‘요한’이라는 이름이 계시됐고 나실인으로 살 것과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사 40:3~5; 마 3:3)와 말라기(말 4:5~6)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빈 들에서 경건하고 청빈한 나실인으로서 생활했습니다.

요한은 로마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제15년경에 요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낮춘 채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예비시키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예수께 세례를 베풀기는 했지만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로서 그분은 반드시 흥하고 자신은 쇠해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70년 8월 29일 로마인들이 성문을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 진입하여 성전을 불태워 파괴합니다. 3년 만에 유대인의 저항은 헤롯의 마사다 요새 포위 공격으로 끝납니다. 열광주의자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되는 대신 로마인들이 성벽을 뚫을 것이 분명해지자 집단 자살을 택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