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지난 1950년 9월,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이 한창이었다. 당시 전남 영광은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주변 지역 좌익세력이 몰려들어 빨치산 활동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가 됐다. 험준한 산악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국내 군경 수복이 늦어졌다. 후퇴했던 적대세력들은 이에 마을에 다시 돌아와 군경가족뿐만 아니라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적대세력들은 무거운 돌을 목에 맨 사람들을 바닷물에 던졌고 구덩이에 생매장했다. 죽창으로 찌르기도 했으며 몽둥이로 폭력을 감행했다. 예배당은 불에 타올랐고 그 불길 속에서 강대상을 끄집어내던 학생도 생명을 빼앗겼다. 그렇게 전남 지역 기독교인 124명이 적대세력에 희생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20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84차 위원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전남지역 기독교 희생 사건에 대해 첫 번째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고 22일 밝혔다. 전남 지역 기독교 희생 사건에 대해서는 이번이 피해자 인정 최초 사례다.
진실화해위는 전남 영광지역의 기독교인 희생 사건이 인민군 퇴각기였던 1950년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5개월여에 걸쳐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사건 가해자인 지방좌익과 빨치산, 유격대 등 적대세력은 이곳 기독교인 124명을 살해했다. 희생자는 염산교회 야월교회(현 백수읍교회) 법성교회 영광읍교회(현 영광대교회) 묘량교회 등 전남 영광지역에 집중됐다.
희생자들은 기독교인이거나 지역 유지 또는 그 일가족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진실규명대상자 124명 중 남성이 65명(52.4%), 여성이 59명(47.6%)인 것으로 조사됐다. 19세 미만 희생자가 70명(56.5%)으로 과반을 차지했다. 일반 교인이 100명(80.7%)으로 가장 많았으며 집사가 16명(12.9%), 목사·장로 등은 8명(6.4%)이었다.
염산교회(최성남 목사)는 단일교회로는 최대인 77명의 교인을 잃은 공동체다. 당시 전 교인의 3분의 2 수준이었다. 염산교회 교인들은 천국의 소망이 있었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레 자신들을 죽이는 적대세력을 긍휼히 여기면서 순교의 제물이 됐다고 최성남 목사는 설명했다.
최 목사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교인들은 순교의 순간에도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며 “교회는 선진들의 순교신앙을 본받아 주님을 섬기며 우리의 상급이 하늘에 있음을 확신한다.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나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최 목사는 “순교하신 분들의 진실을 파헤쳐준 진실화해위의 이번 결정에 감사하다”며 “우리 주위에는 알게 모르게 더 많은 진실이 가려져 있고 잊히고 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하셨던 분들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목소리들이 남겨지면 앞으로 다음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이 올곧게 이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진실규명 결정으로 진실화해위 자체 직권조사를 통해 밝힌 6·25 전쟁 전후의 종교인 희생자는 전체 373명으로 집계됐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북한 정권의 사과 촉구를 비롯해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사과, 피해 복구 및 추모사업 지원 등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김동규 기자 k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