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김진표 전 국회의장 “겸손이 해법입니다”

입력 2024-08-21 15:07
김진표 전 국회의장. 사진=신석현 포토그래퍼

“정치인들이 먼저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정쟁이 과도하게 유발됩니다. 성경은 인간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이 죄성은 오만이나 교만이란 과정을 통해 발현된다고 전합니다. 자기가 부족한 걸 알면 남을 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이들과 대화할 여지가 생기고 의논과 타협점을 찾게 되지 않겠습니까.”

“정치라는 건 본래 부족한 인간들이 법과 제도와 행정의 틀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순화시키고 완화시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우리 정치는 그런 본령을 잊고 정권 쟁탈이란 목적을 위해 없는 갈등도 만들고 증폭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독 정치인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함의 모범을 보이고 여야가 함께 기도함으로써 대화의 틀을 만드는데 노력해 주면 좋겠습니다.”

김진표(77) 전 국회의장은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이다. 1973년 행정고시를 통해 정부에 들어가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재정경제부 차관, 국무조정실장, 재정경제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겸 교육부총리를 역임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내리 5선을 하며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경제관료 30년, 국회의원 20년 등 반세기 공직 생활을 마무리한 그를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김 전 의장은 “인생을 돌아보면 신학에서 말하는 예정설(豫定說)을 느끼게 된다”면서 “하나님이 제게 생명을 주실 때부터 살아오는 모든 내내 예수님을 떠나지 않게 해주셨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부친과 둘만 월남
김 전 의장은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이 고향이다. 38선 바로 아래 마을, 강화도 북쪽 예성강 건너편이다. 젊은 나이에 면장을 맡았던 부친은 6·25 전쟁이 발발한 25일 새벽 뒷산에 붉은 기운이 어리는 걸 보고 처음엔 산불이 난 줄 알았다고 전했다. ‘오뉴월에 무슨 산불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인민군 군복의 붉은 줄이었다. 은천면은 6·25 당시 공산군이 제일 먼저 점령한 마을이다. 면장이던 부친과 경찰서장이던 고모부는 간신히 마루 밑을 뜯어 방공호에 대피해 9·28 수복 때까지 석 달을 버티며 목숨을 부지했고, 1·4후퇴 땐 장자였던 김 전 의장만 배에 태워 강화도로 피난했다. 곧 돌아갈 줄 알고 어머니와 처를 고향에 남긴 부친은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경기도 수원은 김 전 의장 가족에게 제2의 고향이었다. 부친과 둘만 월남한 그는 수원에서도 월세가 가장 싼 단칸방을 구했는데, 교회 바로 옆이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위해 날마다 일곱 번을 일곱 번씩 마흔아홉 번 새벽종을 치는 교회 옆, 새벽잠을 잘 수 없기에 월세가 가장 쌌던 곳이었다. 김 전 의장은 “당연히 교회가 내 집이고 놀이터가 됐다”면서 “유년 시절부터 교회 생활에 아주 익숙했다”고 말했다.


주님을 만나기까지
김 전 의장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건 수원중 3학년 재학 시절”이라고 밝혔다. 그때 미국 에서 갓 귀국한 김장환 목사를 만났다. 현재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극동방송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김 목사가 20대였던 시절이었고 10대이던 김 전 의장은 김 목사가 국내에 본격 도입한 한국십대선교회(YFC)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당시 수원중 학생회장이던 김 전 의장은 청소년을 위한 선교 운동(Youth For Christ)이던 YFC 활동을 위해 점심시간 교실을 돌며 전도 활동을 하던 걸 기억한다. 김 전 의장은 “새벽 예배는 물론 수원의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저녁 예배까지 드려야 맘이 편해지고 입시 공부에도 전념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경복고 수석합격으로 서울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러나 서울대 법대 입시에 실패하는 좌절도 겪는다. 공부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책가방을 풀어 책을 정리하면서 교과서를 읽어보며 예습과 복습을 생활화했던 그였는데, 고교시절 하숙과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교만했던게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김 전 의장은 “첫 해엔 자체 채점결과 법대 커트라인을 상회해 이러다 수석하는 거 아니냐하고 오만했다가 낙방했고, 그 다음엔 점수 계산이 커트라인에 못 미쳐 안 되는 건가 했다가 합격했다”면서 “오만과 겸손에 따라 얼마나 삶이 차이나는지 십대 시절에 겪었다”고 말했다.


“합력하여 선을”
김 전 의장은 이날 아침에 진행한 묵상이라며 스마트폰을 열어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가 제작한 ‘오늘의 양식’ 애플리케이션을 보여줬다. 성경 말씀과 찬양, 이를 적용한 일화와 기도문, 그리고 한글뿐만 아니라 곧이어 반복되는 동일 내용의 영어 버전까지 매일 짧게 읽고 듣고 묵상하는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다. 김 전 의장은 “저는 스마트폰으로 매일 새벽 이를 묵상하고, 월간지로도 제작되는 책은 매달 5권을 구입해 주위에 전도용으로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30년 공직 생활과 20년 정치인 생활을 돌아보며 김 전 의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를 인생 말씀으로 꼽았다. 그는 “종교인 과세 등 교회의 난제들을 같이 기도하면서 돕고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주님이 공직자나 정치인으로서 믿음의 사람이 필요해 저를 이렇게 돌보셨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역시 인생에서 큰 힘이 된 말씀이라고 전했다. 김 전 의장은 “내가 기도하는 그 시점에 그 내용대로 응답하시지는 않을 지라도 반드시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답하시는 주님을 알게 됐다”면서 “세월이 지나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그 응답이 내가 간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에게 좋은 일이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수원중앙침례교회(고명진 목사) 명예장로인 김 전 의장은 한국교회가 무엇보다 기도의 힘을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기도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의 대화 통로이고, 거기서 모든 걸 정직하고 솔직하게 다 고백하고 눈물어린 기도를 할 때 반드시 응답이 온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눈물로 지새운 한국교회 철야예배 새벽기도의 전통이 확고했을 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에서 가장 단시간 내에 대한민국이 선교 대국으로 확장된 역사가 일어났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 보내는 나라로 이룬 기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고 강조했다.


저출생 극복에 총력을
김 전 의장은 지난 6월 글로벌혁신연구원을 개원하고 이사장직을 맡았다. 연구원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저출생 극복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제3국에 나누는 공적개발원조(ODA)를 혁신하자는 의제를 제시했다. 김 전 의장은 “합계출산율 0.72명 시대에 저출생 대책이란 장기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도움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저출생 현상 극복을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필요한 보육 교육 주거 문제를 나라가 책임지는 내용을 헌법의 기본권으로 못 박는 개헌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국회의장 시절 50여개국을 순방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일 방법을 고민하다가 개발도상국들이 보다 실질적으로 인재 개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ODA를 업그레이드해 줄 것을 요청해 이를 돕고 있다고도 했다.

김 전 의장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문제는 기독교 선교 환경에도 더없이 큰 걸림돌”이라며 “한국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기도하면서 합력해 선을 이루며 저출생 극복에 나선다면 사회로부터도 박수를 받아 선교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의장은 정치권을 향해서도 “보육에 관해 종교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법률을 보완하고 규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교회는 주중 시설을 제공하고 국가는 돌봄 교사들의 인건비를 예산으로 지급해 아이들을 더욱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도록 이끌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