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 또 울린 ‘발로 쓴 편지’…응원 더 필요한 선수들

입력 2024-08-15 00:03
전민재가 2016년 리우 패럴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취재진에 자필 편지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일보 DB


#키 작은 여성 육상 선수가 우승 소감을 대신 읽어주는 사람 옆에서 표정이 일그러진 채 쏟아지는 눈물을 삼켰다. 말이 어눌한 선수는 메달을 딸 경우 대비해 자신의 마음을 종이에 미리 써왔다. 두 손이 불편한 그는 발가락으로 펜을 잡고 편지를 썼다고 했다.

파리 올림픽이 끝나고 곧 시작될 파리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하는 육상선수 전민재(47)의 8년 전 ‘발로 쓴 편지’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50살이 가까운 나이에 남다른 근성으로 실력을 유지한 노장 선수에 대한 존경을 넘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 대한 감탄이 이어지고 있다.

전민재가 2016년 리우 패럴림픽에서 취재진에 자필 편지를 보여주면서 울음을 참고 있다. 국민일보 DB

최근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는 전민재가 2016년 9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패럴림픽(이하 리우 패럴림픽) 여자 200m T36등급 결선에서 2위에 오른 뒤 취재진에 공개한 발로 쓴 편지가 공유되고 있다. 전민재는 당시 A4용지 3장을 이어 붙인 정도의 긴 노트에 그간의 각오와 감사, 소감 등을 적어왔고, 관계자가 이를 대신해 읽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는 뇌성마비 후유증 때문에 발음이 명확하지 못하고 손도 심하게 뒤틀려 있어 펜을 잡고 글자를 쓸 수 없었다. 발에 펜을 끼워 한 자 한 자 적은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한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전민재의 2016년 발편지 소감 영상. 81만명이 지켜보며 감동했다. 인스타그램 캡처


“주변에서 너는 못 할 거야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메달을 딸 수 없다고 비아냥거리며 제 꿈을 짓밟는 말들로 제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혼자 눈물을 삼키면서 저 자신을 다독이며 저와의 외로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훈련은 저 자신과 싸움이었기 때문에 홀로 외로이 버티면서 때로는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힘든 상황에 좌절하며 서러운 눈물을 삼켜야 했지만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저는 포기하지 않고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앞으로 선수 생활은 2018년까지만 하고 멋지게 은퇴를 하고 싶어요. 그때까지만 전민재를 응원 많이 해주세요.”

전민재가 2016년 리우 패럴림픽에서 발로 작성한 소감 편지. 국민일보 DB


전민재는 다섯 살 때 뇌염을 앓은 뒤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평소 가족에게 “20살 까지만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오랫동안 집에서만 머물렀다. 키는 149㎝까지밖에 자라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열아홉 살이 되어서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이던 2003년 체육 교사 제안으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그는 2006년 아시아-태평양 장애인 육상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100m, 200m에서 동메달을 따는 등 국제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패럴림픽에서만 은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가 개최하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장애인 아시안 게임에서 딴 금메달만 5개에 달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스마일 레이서’라는 별명이 붙은 전민재지만, 그는 자신이 발로 쓴 편지를 관계자가 대신 읽는 동안 벅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한 인스타그램 계정에 최근 다시 올라온 전민재의 발 편지 영상은 81만 재생수를 기록하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파리 패럴림픽에서 전민재 선수를 뜨겁게 응원해달라”는 댓글로 선수를 응원했다.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장성규도 “존경한다”는 댓글로 호응했다.

전민재의 어머니인 한재영씨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저장된 딸의 사진. 한씨 제공


전민재의 어머니 한재영(73)씨는 1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육상 선수로서 많은 나이로 엄청나게 노력해 이룬 성과지만 엄마로서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마지막 패럴림픽인 이번 대회에서 다치지 말고 본인이 희망한 대로 동메달을 목에 걸고 한국에 돌아오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전민재는 7남매 중 셋째 딸이다.

전민재는 학교에 다니고부터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주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 한씨는 “특히 목사님과 사모님, 교회 성도님들이 민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데려다주기도 하고 도와주셨다”고 전했다. 그가 대회 우승 후 감독, 코치, 가족뿐 아니라 ‘교회 사람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잊지 않는 이유다.

전민재가 이번 파리 패럴림픽을 준비하며 촬영한 프로필 사진. 대한장애인체육회


한씨에게 딸 전민재는 “하늘에서 내려준 것 같이 착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효녀”다. 그렇기에 집에 와서 쉴 때도 운동을 거르지 않고,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저녁 5시 이후엔 음식을 먹지 않는 등 지난 21년간 선수 생활 동안 절제하는 삶을 사는 딸을 무척 애틋하게 생각했다.

전민재는 특히 올 4월 아버지 소천으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모친이 자신의 뒷바라지로 아버지 곁을 오랫동안 떠나있던 날이 많아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 한씨는 2020년부터 딸의 생활과 훈련 보조를 전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패럴림픽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동행하지 못했다.

전민재는 이번 대회를 포함해 5번째 패럴림픽에 출전하고 있다. 그는 대한장애인체육회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목표는 항상 최고의 성적을 내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부상 없이 3위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운동을 망설이는 다른 장애인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말엔 용기를 북돋는 이야기로 도전을 권면했다.

“운동을 하지 않던 분들이 운동을 시작하기란 어려운 결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망설임을 뒤로 하고 시작을 한다면 반은 성공입니다. 반드시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운동이 눈물 날 정도로 힘들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운동이에요. 힘내세요. 파이팅 하세요. 할 수 있습니다.”

전민재가 이번 파리 패럴림픽을 준비하며 대한장애인체육회에 밝힌 각오. 대한장애인체육회


전민재는 이번 패럴림픽 참가하는 한국대표팀 선수단 일부와 함께 14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파리로 출국했다. 그를 포함한 17개 종목 83명의 선수가 28일 개막해 내달 8일까지 열리는 파리 패럴림픽에 출전한다. ‘장애인 육상의 레전드’ 전민재는 31일 오후 9시25분에 T36 여자 200m 1라운드 예선에 나선다.

정 가운데 가장 키가 작은 선수가 전민재다. 파리패럴림픽 전북 선수단 제공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