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임초리에서 12

입력 2024-08-11 08:36

나는 수많은 결혼 신부를 꾸며주며 반세기가 넘도록 일해 왔다. 나의 젊은 날 다양한 인생 철학을 가진 부모세대와 젊은 청년들에게 나는 자주 얘기했다. 소중하기 때문에 서로를 지켜주고 삶의 모범이 돼야 한다고. 예약을 할 때마다 남편의 십계명과 아내의 십계명을 함께 동봉하고 거기에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넣어 주면서 예비신부의 손을 붙들고 당부하곤 했다.

첫날 밤에 둘이서 손을 붙들고 무릎 꿇어 기도하길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우리가 모두 청소년 문제의 책임을 느끼며 훌륭한 자녀 애국자와 효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를 갈망하는 성스러운 첫날 밤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하나님이 미래의 가정문화를 염려하시며 우리에게 남겨주신 말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순수성과 전통성을 강조하는 대목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주옥같은 말씀들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시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경성함도 헛되다고 하셨다.

또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며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하셨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화살 같으며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다고 하셨다. 자자손손 우리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영육이 성결하기를 바라시고 죄로부터 구별된 삶을 강조하셨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염려하신 하나님은 모든 인생이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아신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 인류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속량하셨다. 이러한 은혜 안에 구속의 빚진 자녀 된 우리가 성결을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절제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다섯 오빠 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여자가 돈 벌어 남자를 공부시키는 것은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 데이트 중에 그가 교통비가 없어서 시내에 나올 수 없었을 때도 나는 단돈 천 원을 그에게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검소한 생활이 익숙해서 사소한 것이라도 내가 부담하는 것을 어색해 했다.

나는 결혼식 날 수고해줄 청년들의 선물도 준비했다. 친구들은 그날 자정까지 함께 지내기로 했다. 결혼 전날은 친구 숙이와 하룻밤을 지냈다. 친구는 나보다 2년 전에 결혼했는데 자기는 결혼 전날 도망가려고 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가기 힘들 것 같았고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나더러 너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때 친구에게 지난 결혼에 대한 시댁 어른들의 시각에 대해 그간의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친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멋지다. 멋져. 역시 넌 다르구나”라고 했다. 나는 “뭐가 멋지고 말고니, 개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밤새 울었는데…. 청첩장을 손으로 찢고 결혼도 다 파토내고 싶었단다.”

친구가 말했다. 경상도 사투리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 넌 들어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지쳤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와 신부 손을 덥석 잡았단다. 저녁에 살롱이라도 가서 결혼식후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었다는데 이젠 복잡하고 너저분한 과정은 다 끝났으니 ‘너는 내꺼야’하는 속물근성을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생각 할 여유도 없이 신랑 손에 잡혀서 식당에 따라갔더니 “버떡 먹어라. 버떡 가자. 버떡 자자”고 했단다. 결혼식장에서부터 쌓인 긴장과 피곤에 지쳐 말싸움할 기력도 없었다고 했다. 아침에 깨어보니 그 인간이 지가 내 남편이라고 했다는 반세기가 지난 옛 얘기다.

남편은 서울공대 합격 발표를 보는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신문에 실린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무릎 꿇어 먼저 하나님께 두 손 들고 감사했으나 교정 앞에서 꿈같은 그 날 자신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혼자 서울대학교 정문을 찾았다.

교정에 붙은 본인의 이름 ‘이광부’를 외치며 자신에게 “잘했어. 너 수고했다. 장하다”라고 돌아섰으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단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 시작이라고 한 계단 올라서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절히 되뇌며 “주님 지금부터 주님 손을 꼭 붙들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정문을 나서는데 서울S공대 배지가 새겨진 스포츠 모자 하나를 살 수 없었던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상했다.

막상 결혼을 앞두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후회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동백 아가씨처럼 단봇짐 싸 들고 고향을 떠날 때 버스 앞에서 올망졸망 교회의 아동부 미래의 꿈나무들을 하나님께 부탁드리고 헤어질 때는 그 어떤 고난 속에서라도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외할머니가 살아계신 외갓집을 찾아갔더니 냉기가 꽉 찬, 하룻밤도 기거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아홉 칸이나 남아도는 방에는 사람 그림자도 없는 절간 같았다.


<늦둥이>
- 김국애

어스름한 밤길에
외길을 밝히는 즐비한 꽃불
수백송이 붉은 영산홍이다
너희들 뒤늦게 웬일이니
어디 숨어있었느냐
놀란 걸음으로 다가갔다
너희들 가출 했었구나

우리 늦둥이랍니다
만개하던 삼사오월에
다시 찾아온 늦둥이
금쪽같은 선물,
늦둥이, 받아본 이들만 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꽃은 시들어 떨어지고
새파란 입새만 남아
서운했던 그 자리에
뒤늦게 찾아온 늦둥이들
외길에 즐비한 꽃불이 되었다
늦둥이, 받아본 이들만 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