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올림픽 복싱 여자 54㎏급에서 나란히 동메달을 딴 한국의 임애지(화순군청)와 북한의 방철미가 시상식에 이어 기자회견에 함께 참석했다.
이번 대회에서 남북이 함께 시상대에 올라가는 장면을 연출한 건 탁구 혼합복식에 이어 두 번째다. 탁구에서 한국의 임종훈(한국거래소)-신유빈(대한항공) 조가 동메달, 북한 리정식-김금용 조가 은메달을 획득했던 것과 달리 복싱에서는 똑같이 동메달을 따 단상에 나란히 섰다.
임애지와 방철미는 9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롤랑가로스 경기장에서 열린 복싱 여자 54㎏급 결승전이 끝난 뒤 열린 메달 세리머니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상대로 향할 때 맨 앞에 선 임애지는 환하게 웃으며 관중에게 인사했으나 바로 뒤 방철미는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메달 수여식에 이은 빅토리 세리머니 때는 ‘작은 교류’가 있었다. 금메달리스트 창위안이 있는 가장 높은 단상에 임애지가 바로 올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먼저 올라가 있던 방철미가 손짓을 보냈다. 다만 이때도 방철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셀카 세리머니’는 임애지가 맡았는데 이 순간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가장 가까워졌다.
시상식이 끝난 뒤 임애지는 공동취재구역에서 “(방철미 선수가) 말 못 하는 사정이 있구나 싶어서 나도 말을 걸지 않았다. 곤란하구나 싶었다”면서 “그런 분위기에서 내가 ‘언니’라고 부르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제가 더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호상 한국 복싱대표팀 감독은 “시상식에 오기 위해 우리와 북한 선수단 둘만 버스에 탔다. (그런데) 북한 지도자가 쳐다보니까 선수가 말을 못 하는 것 같더라”고 전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임애지 답변에 방철미 잠시 ‘미소’
이어진 기자회견에서까지 긴장 상태는 계속됐다. 다만 시상식과 공동취재구역에서 단 한 번도 미소를 보이지 않던 방철미가 기자회견에서는 임애지의 한마디에 잠시 웃었다.
일본 기자가 ‘임애지가 준결승 끝나고 시상식에서 방철미 선수를 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 실제로 안아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임애지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뒤 임애지는 “비밀로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방철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 외의 질문에는 역시나 표정도 답변도 딱딱했다. 방철미는 동메달 소감에 대해 “이번 경기에서 1등을 하자고 생각하고 왔지만 3등밖에 쟁취하지 못했다”며 “올림픽은 여느 경기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과는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같은 동메달을 딴 임애지의 소감과는 상반된 분위기였다. 임애지는 “파리올림픽에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서 행복했다. 관중 함성을 들으며 더 힘을 얻었다. 올림픽같이 축제를 즐길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남북 선수가 나란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소감’을 물었을 때도 둘의 온도 차는 극명했다. 임애지는 “지금은 (남북이) 나뉘어졌지만 같이 힘을 내서 메달을 따서 좋았다. 다음에는 (방철미와) 결승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고, 방철미는 “선수로 같은 순위에 선 것에 다른 것은 없다. 다른 감정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집에 메달을 가져가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걸어주고 싶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임애지는 “파리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도움받은 사람이 너무 많다. 만나는 사람 다 한 번씩 걸어줄 것 같다”고 했다. 방철미는 “동메달이 내가 바라던 그런 것(금메달)이 아니니까 별로 소감이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기자회견 내내 단상 구석에서 북한 복싱 지도자가 ‘매의 눈’으로 방철미의 답변을 듣고 있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