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한복판에 다시 한번 태극기가 펄럭였다. 태권도 여자 57㎏급 김유진(23·울산광역시체육회)이 생애 첫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김유진(세계 랭킹 24위)은 9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57㎏급 결승에서 나히드 키야니찬데(이란·2위)를 2대 0(5-1, 9-0) 완승을 거둬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여자 57㎏급에서 16년간 끊겨있던 금맥을 이었다. 한국 태권도는 이 체급에서 2000 시드니올림픽(정재은), 2004 아테네올림픽(장지원), 2008 베이징올림픽(임수정)까지 3연속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으나 한동안 금빛 낭보를 전하지 못했다.
결승전 1라운드에서 두 선수는 다소 긴 탐색전을 펼쳤다. 경기 시작 1분30초가 지나도록 양측 모두 불이 켜지지 않으며 0-0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키야니찬데가 거세게 달려드는 과정에서 감점을 당한 뒤부터는 급격히 기세가 기울었다. 차분히 상대 빈틈을 노린 김유진은 1라운드를 5-1로 마쳤다.
2라운드 들어서도 김유진은 발차기로 얼굴을 가격하며 3-0으로 앞서갔다. 상대가 더욱 공세를 퍼부었으나 김유진은 긴 다리로 상대 몸통을 조준해 리드를 벌렸다. 라운드 종료 1초를 남겨두고 0득점에 그친 키야니찬데는 결과에 승복하듯 김유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김유진은 이번 올림픽 한국 태권도 대표팀 가운데 가장 주목도가 덜했던 선수다. WT 랭킹 5위 안에 든 박태준(경희대·5위), 서건우(한국체대), 이다빈(서울특별시청·이상 4위)과 달리 대한태권도협회 내부 선발전-대륙별 선발전 등을 추가로 거쳐 파리행 막차를 탔다.
메달 기대감이 비교적 적었음에도 이날 세계랭킹 1, 2, 4, 5위를 모두 잡는 이변을 썼다. 준결승에선 세계 1위 뤄쭝스(중국)를 꺾는 저력을 보여줬다. 뤄쭝스는 아시안게임 2연패에 빛나는 이 체급 최강자로, 지난 6월 세계태권도연맹(WT) 랭킹 포인트에서도 2위 키야니찬데(435.77)를 압도적인 격차로 따돌리고 1위(랭킹 포인트 570.04) 자리를 지킨 바 있다.
김유진은 경기 후 “세계 랭킹은 별 거 아니고 숫자에 불과하다”며 “오늘 몸을 푸는데 너무 좋아서 ‘무슨 일 내겠다’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운동을 관두고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 지옥길을 걸어왔다”며 “종주국 자존심을 세우는 데 보탬이 돼 정말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생애 첫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김유진의 태권도 여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김유진은 “LA올림픽도 도전하고 싶고, 지금은 내년 세계선수권 대표가 되는 게 목표”라며 “아시안게임까지 그랜드슬램도 달성하고 싶다”고 전했다.
한편 김유진의 금메달로 한국 선수단은 13번째 금메달을 신고했다. 한국은 2008 베이징올림픽과 2012 런던올림픽에서 수립한 역대 단일 대회 최다 금메달 기록(13개)과 동률을 이뤘다.
파리=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