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유럽 국가 외에 두 번째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 방문한 국가.” 하이메 알레한드레 주한 스페인대사관 관광 영사 스페인 관광청 아시아 디렉터는 지난 5월 열린 2024 서울국제관광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순례길을 향한 한국인들의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라 할만하다. 그런 사랑에 힘입어서인지 지난해 스페인을 방문한 한국인 여행객 수가 43만 명을 돌파했다. 43만 명이면 지난 6월 기준 용인시 기흥구 인구(약 43만 명)에 맞먹는다. 그리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을 조성하려는 지자체와 종교단체, 중앙정부의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실제로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국내에도 가볼 만한 기독교 순례길이 이미 많이 조성돼 있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국내에서 방문할 만한 기독교 순례길을 소개하고, 이러한 순례길 개발이 많아지는 이유를 알아봤다.
전국에 조성된 순례길만 수십 개
인천 주안중앙교회(박응순 목사)는 지난달 13일 서울 정동길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에 참여한 신승철(61) 집사는 7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기독교 유적지를 보면서 한국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주안중앙교회는 다음 학기부터 기독교 순례길 투어를 교회학교 프로그램으로 도입하기로 했다.
기독교 순례길 수요가 증가하면서 순례자들을 이끌 해설사 양성도 본격화하고 있다. 6일 (사)한국순례길(이사장 전재규)은 서울 동작구 숭실대에서 ‘한국기독교 역사문화해설사 창직과정’을 출범했다. 12주 과정의 교육 과정을 마치면 국내 선교지 투어 프로그램 해설사로 활동할 수 있다. 지난해 5월 출범한 한국순례길은 현재 대구와 전라남도 신안, 강원도 고성 화진포, 광주광역시 등에서 기독교 순례길을 조성 중이다.
(사)한국순례길은 대구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담긴 청라언덕을 중심으로 순례길이 조성 중이다.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대구 제중원(현 동산의료원)과 대구 애락원 등을 잇는 순례길은 대구의 기독교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주요 코스다. 대구시도 순례길 조성에 협력하고 있다.
전라남도 신안에서는 신안군과 사단법인 한국순례길이 협력해 일제 강점기 이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설립한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삶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순례길을 조성하고 있다. 신안의 자연경관과 함께 문 전도사의 헌신적인 삶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신앙적인 의미를 더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전라남도 순천시 매산등 일원에는 순천시와 한국관광협동조합이 협력해 조성한 성지순례길이 있다. 매산등 성지순례길은 100년 전 선교사가 걸었던 길을 따라 교회, 교육, 주거, 의료구역과 기도산을 탐방하는 5개의 코스로 구성돼 있다.
제주도에서는 제주도청과 제주관광공사, 제주CBS가 협력해 5개의 코스를 개발했다. 각각 순종의 길, 순교의 길, 사명의 길, 화해의 길, 은혜의 첫 길이라는 주제로 초기 제주 기독교인들의 순교터와 부흥사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코스다. 제주의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창조의 섭리를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집트 카이로와 캐나다 토론토 등에서 대한한공 지사장을 지낸 강사겸(63) 서울 연동교회 장로는 국내 기독교 순례지 탐방 매니아다. 주말이면 교인들과 함께 서울은 물론이고 대구와 광주 신안 여수 등에 마련된 순례지를 찾고 있다. 강 장로는 “항공사 직원으로 5대양6대주의 명소를 두루 다녀봤지만 한국에 조성된 순례길이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며 “골목마다 건물마다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면 신앙 성장에도 큰 자극이 된다”고 전했다.
순례길 조성은 ‘트랜드’
이런 움직임은 비단 개신교에 국한하지 않는다. 인천시는 최근 ‘종교 관광 도시’로의 변화를 천명했다.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 성공회 등 여러 종단과 연계해 개항장 성지순례 코스를 조성하고 있다. 현재 시행 중인 모바일 스탬프 투어를 강화도 등 섬 지역 순교지로 확대하고, 종교 관련 안내서를 제작해 배포할 예정이다. 성지순례객과 일반 관광객을 유치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방침이다.
인천 중구 개항장에서 복합문화공간 ‘개항도시’를 운영 중인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은 “한국의 최초 감리교회인 내리교회에 역사관이 조성된 후, 주말마다 인천 개항장을 찾는 교회 버스가 매주 수십 대씩 들어온다”며 “이런 현상은 유정복 시장이 제물포 르네상스에서 종교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전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국내 종교 순례길 조성에 관한 관심이 적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유인촌 장관의 특별 지시로 국내 종교 순례길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고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지역의 1000년 역사, 자연, 한국문화를 묶는 ‘종교문화유산의 길’을 시범사업으로 선정했다. 종교문화유산의 길은 올해 말 공개될 예정이다. 백중현 문체부 종무관은 “문체부가 종교 순례길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종교 순례길은 치유의 개념을 담고 있으며, 지역 상권 활성화와도 연계된다”고 설명했다.
순례길의 현대적 의미
최 소장은 “최근 순례길 조성이 늘어난 이유는 지자체의 도시 재생 사업이 종교단체별 역사 보존 사업과 연계하면서 시너지를 내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교단별 역사 보존 사업은 교단의 순교자나 부흥사의 유적지를 발굴하고 이를 기반으로 순례길을 조성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며 “여기 지자체나 중앙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이 늘어나면서 빠르게 활성화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체부 종교문화유산의 길 자문을 맡은 옥성삼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사무총장은 ‘순례길 3.0’의 개념을 소개했다. 순례 3.0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한 ‘순례 1.0’, 신앙적 수행과 관광을 동반한 ‘순례 2.0’ 이후의 패러다임이다. 삶의 피로감을 해소하고 성찰을 위해 걷는 형태다. 옥 사무총장은 “현대 사회에서 걷기 여행이 신앙 활동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며 “이러한 관점은 문체부의 종교문화유산의 길 사업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종교문화유산의 길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휴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