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5 병원에서 지난 6월 사직한 4년 차 전공의 A씨는 요즘 자신을 ‘백수’로 부른다. 지난 2월 의료계 집단행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병원에서 36시간 연속 근무를 섰다. 격무에 시달렸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오전 10시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한다. 취미로 프로그래밍과 코딩을 독학하고, 의료 인공지능(AI) 관련 외부 강의도 찾아다닌다. A씨는 6일 “지난 3년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사실상 백수”라면서 “사태가 길어지면서 이제는 ‘불안하다’는 느낌마저 안 든다”고 했다.
9월 하반기 전공의 지원율이 모집 인원의 1.4%(104명)에 그치면서 정부는 추가 모집을 예고했지만 대다수 전공의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국민일보가 만난 이들은 수련을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이 늦어지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빅5 병원의 한 수련 담당 교수도 “전공의들은 요구조건을 들어줄 때까지 절대로 움직일 의향이 없다고 한다”며 “대체로 경제적 형편도 넉넉해서 전문의 취득 나이가 늦춰지는 걸 제외하면 당장 아쉬워할 전공의들이 없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당장 소속이 사라진 사직 전공의들은 구직에 나서면서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 주로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요양병원이나 응급실 당직, 개원가로 향하는 이들도 있고 해외의사면허로 눈을 돌린 이들도 있다.
서울의 한 수련병원에서 지난달 31일 사직한 정형외과 2년 차 전공의 B씨는 최근 서울 시내 1차 병원 취업에 성공했다. ‘수술하는 의사’를 목표했던 그는 현재 수술에 필요한 임상술기가 아닌 1차 병원 운영, 환자 진찰 등을 배우고 있다. 그는 “전공의 때는 퇴근을 해도 환자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병원에 가는 날도 있었다”며 “그때보다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11시간 주5일제로 근무하고, 퇴근한 뒤에는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를 준비한다.
시장에서는 구직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7월 전공의가 대거 사직 처리되면서 일반의(GP) 공급이 늘어나 구직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전공의 C씨는 “내년 사태 해결 전까지 임시로 일자리를 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기대하는 월급과 차이 나는 경우가 많아서 당분간 그냥 쉬자는 목소리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개원가에서는 전공의 7000여명이 몰리면서 일반의 월급이 기존의 반토막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전공의들이 수련 과정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다. 사태가 잘 해결돼 다시 수련을 이어가길 바라는 이들이 적잖다. B씨는 “사실 외국 나가는 게 말이 쉽지, 준비도 힘들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야 해서 결심이 필요하다”며 “불안하고 걱정도 되지만 당장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태가 잘 해결되면 원래 일했던 곳에서 다시 수련을 이어가고 싶다. 그게 안 되더라도 정형외과 수련을 계속하고 싶다”는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필수과 전공의 D씨는 “당연히 수련을 받고 싶지만 (전공의 7대 요구안을) 다 내주고 손해 보면서 수련병원에서 했던 고생을 다시 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 그는 다니던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한편 학회에서 주최하는 임상술기강좌를 수강하며 진로를 고심 중이다.
의료계는 사직 전공의들의 경력 단절 영향을 줄이기 위해 지원에 나서고 있다. 대한정형외과의사회는 지난 4일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근골격계 초음파 연수 강좌’를 열었다. 박근태 의협 ‘전공의 진로지원 TF’ 위원장은 “전공의들도 나중에는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수련병원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기도의사회가 지난 3일 개최한 ‘전공의를 위한 개원 준비 설명회’에는 전공의 440여명이 몰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정헌 김유나 기자 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