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호 목사·보길도 동광교회
섬에는 어부들만 사는 게 아닙니다. 늦게 고향을 찾아온 사람, 도시를 뒤로하고 노후에 어촌 생활을 갈망하며 온 사람, 실패한 사람과 성공한 사람도 모여 사는 곳이 섬마을입니다. 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섬에는 단순히 어부들만 옹기종기 모여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곳에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성진씨입니다. 성진씨는 돈은 땡전 한 푼 없고 알코올 중독자이며 전과만 20범이 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국 교도소를 다 거치고 마지막에는 가장 무서운 사람들만 간다는 청송 감호소에 갔다가 출소했습니다. 저는 당시 교회를 막 개척하고 예배당을 짓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을 안전을 위한 옆 동네 이장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성진씨를 만나게 됐습니다.
성진씨는 폐허로 변한 고향의 부모님 집에 살려고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당장 거처할 집이 없었기에 부모님 집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진씨가 돌아오자 동네 이장님이 방송을 합니다. “아, 아, 이장입니다. 성진이가 왔습니다. 동네 주민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성진씨는 56세 나이에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습니다. 마치 산짐승이 심하게 다쳐서 집 앞에 쓰러진 모습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저를 한번 살려주세요” 하면서 제 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부모님 집엔 쌀도 없고 전기와 수도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저 역시 돈이 생길 때마다 교회 건축 자재를 구해 겨우 한 땀 한 땀 공사를 해나가는 처지였지만 그 돈을 쪼개 성진씨의 밀린 공과금과 필요한 생필품을 조달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정신적 치료가 시급한 그를 전남 해남의 혜민정신과의원에 데려가 진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의 약값을 대신 결제하고 담배를 당장 끊으면 그것으로 오는 금단 현상의 고통으로 머리를 벽에 사정없이 찌으려는 괴로움을 막기 위해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본인이 최대한 절제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담뱃값도 대주었습니다. 이런 일은 작은 섬 교회 목사가 아직 개척 예배도 못 드린 상태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는 게 교회와 목사로서 옳은 일인지 여러 갈등과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고향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한 채 동네 이웃들로부터 모두 외면받고 살아가는 그의 처지가 딱했습니다. 또 본인의 저지른 잘못은 생각지 못하고 자신을 신고해 지금까지 억울하게 옥살이했다는 앙심과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갖고 언제든 마을을 불살라 버리겠다는 복수심 가득 찬 영혼을 그대로 놔두는 것도 목사로서 온당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개척 오픈 예배도 못 드린 가난한 목사에게 이렇게 성진씨 같은 사람을 붙여 주셨는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렇게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관내 복지과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에게 복지 혜택이 오기까지 3개월은 교회 살림에서 나눠 먹으며 점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예배도 잘 드리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에서도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이기에 입에 술만 들어가지 않으면 그래도 착한 심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눈에서 서서히 독기가 빠지고 얼굴빛이 살아나면서 어렵던 3개월 고비가 지나고 나니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로 선정돼 기본 생활에 필요한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정상적인 사람 사는 모습으로 돌아왔고 외면하던 동네 사람들의 시선도 점차 변하면서 길에서 만나면 인사도 받아주고 목사님 말, 잘 들으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신신당부했습니다.
성진씨는 20년은 세상에 속해 살았고 나머지 약 40년은 격리된 교도소에서 살았습니다. 한 영혼을 돌아보는 섬 목회자의 애씀에 그래도 효과가 있었던가 봅니다. 그에게 성경을 쓰라고 숙제를 내주면 착실하게 한 장씩 적어나가고 본인도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매달 고정적으로 정부지원금이 나오면서 교회에 더이상 신세를 지지 않게 된 안도감이 생기자 안정감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바쁜 교회 건축 일로 이틀간 그의 집에 가지 못했는데 그사이 사고를 치고 경찰에 잡혀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7개월을 애태웠는데 말입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