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갑상샘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 27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진 딸. 빛바랜 사진 속 모습으로만 남았던 누군가의 가족이 움직이는 인공지능(AI) 영상으로 재탄생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최효원씨의 작품이다. 최씨는 약 3주 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팔로워들의 가족사진을 AI 영상으로 제작하고 있다.
‘차갑다’고 평가받는 첨단 기술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최씨를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씨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인스타그램 스레드에 올라온 어떤 글 때문이었다. 글쓴이는 오래전 고인이 된 부모님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AI를 공부하고 있던 최씨는 자신이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댓글을 남겼다. 그는 글쓴이로부터 부모님의 사진을 받아 영상으로 변환했다. 사진 속 부모님이 간단한 손짓을 하고 미소 짓는 영상이었다. 말하는 모습은 실제 목소리 데이터가 없는 탓에 구현하지 못했다.
최씨가 해당 영상을 계정에 올린 뒤 다른 스레드 이용자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자신이 첫 돌도 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싶다는 사연도 있었다. 한 이용자는 갑상샘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내왔다. “마지막 모습이 아닌 엄마가 가장 예뻤던 시절, 해맑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27세에 교통사고로 숨진 딸과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하고 싶다는 한 엄마의 사연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사 ‘Studio Staaand’의 공동 대표인 최씨는 업무 외 시간을 활용해 영상화 작업에 몰두했다. 사연을 보낸 이들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프롬프트를 고도화해야 하는 초반에는 꼬박 이틀씩 걸렸던 작업 속도가 점점 사진 1개당 1~2시간 정도로 빨라졌다. 그렇게 3주 동안 50여개의 사진을 영상으로 바꿨다. 작업은 모두 무료로 진행됐다.
20대 초반 사진에 입문했을 때도, 영상에 눈을 뜬 미국 유학 시절에도 최씨의 관심사는 늘 ‘사람’이었다. 저마다의 개인사를 가진 각각의 인격체야말로 최씨에게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원천이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사람과 이들이 사는 현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선의로 시작한 이번 프로젝트도 ‘사람의 이야기’라는 자신의 평소 관심사와 맞닿아 있어 더욱 즐겁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런 다큐멘터리 감독이 ‘가상’ 그 자체인 AI를 공부하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모순적이라며 최씨는 웃어 보였다.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게 될 거라고 다들 우려할 때 가장 마지막에 대체될 직업군으로 예술가가 꼽히곤 했어요.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면 영상 업계 종사자나 일러스트레이터 등 예술 분야 인력이 가장 먼저 대체되는 분위기가 됐죠.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기술이길래’라는 생각이 들었고, 알고 싶어졌어요.”
최씨가 최근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은 그의 생각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출연자 2명이 얼굴 노출을 꺼린 탓에 고민하다가 딥페이크 기술로 얼굴을 바꾼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출연자가 익명을 원할 땐 역광을 사용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찍는 게 기본적인 기법이지만, 최씨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해외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고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AI는 제 명령에 따라 정확한 결과물을 만들어요. 실제 촬영 현장에서처럼 예상치 못한 우연이 주는 재미는 없죠. 하지만 딥페이크 기술로 얼굴을 바꾼 것처럼 AI는 새로운 시도와 유연한 접근, 빠른 작업을 가능케 하고, 제작 비용도 절감해 줘요. 작품의 질을 높여주는 훌륭한 도구인 거죠.”
최씨는 “지금은 기술을 접목해 예술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시대”라며 “다만 AI는 인간의 대체품이 아닌 ‘조수’로서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도 작가가 피사체에 애정이 없으면 실물의 감동을 다 담지 못해요. 작가는 그 순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각도와 빛 등 많은 걸 고민하죠. AI도 마찬가지예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관점이나 애정, 가치 판단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아무리 고도화된 기술을 활용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런 감정도 전달하지 못하는 결과물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사람에게 제공하는 무언가는 반드시 사람의 ‘터치’가 필요한 거죠.”
최씨는 그동안 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생각에 ‘무료 작업’을 고집해 왔던 가족사진 AI 영상화 작업을 조만간 유료화할 생각이다. 본업인 영상 작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요청이 늘어나고, 개인 비용을 투입하는 일도 잦아지면서 무료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부모님에게 젊은 시절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싶다며 “비용을 지불할 테니 작업 기한을 앞당겨 달라”는 요청도 많았다고 한다.
최씨는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을 더욱 책임감 있게 계속하고 싶어서 유료화를 결정하게 됐다”며 “무료 작업도 이틀에 한두 개씩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