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파리올림픽으로 온 세계가 시끄럽습니다. 개회식부터 시작해 동성애 코드와 트랜스젠더 선수 논란 등 때문인데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올림픽에서 이 무슨 논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각국 기독교인 선수들도 보란 듯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자신의 신앙을 확실하게 드러낸 선수로, 이 선수만 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혹시 에릭 리델을 아십니까. 잘 모르신다면 영화 ‘불의 전차’는 들어보셨을까요? ‘주일에 뛰지 않는 남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네? 아, 잘 아신다고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역시 더미션 독자이시군요.
에릭 리델(1902~1945)도 딱 100년 전 프랑스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영국 육상 국가 대표였던 리델은 100m의 유력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주일에 경기가 열리는 걸 안 뒤 출전을 거부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법을 따를 뿐”이라는 말을 남겼지요. 경기를 거부한 그를 향한 비난은 엄청났습니다. 그의 이런 담대한 결정은 중국 선교사의 아들로서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는 짐을 싸고 귀국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출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월요일 열리는 400m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400m는 리델의 주 종목이 아니었기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요.
다만 팀의 물리치료사는 그를 믿었습니다. 그는 리델에게 쪽지를 건넸습니다. 거기엔 사무엘상 2장 30절의 한 부분이 씌어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말씀의 힘이 작용했던 것일까요. 그는 4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어 200m에서도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반전 드라마도 이런 반전 드라마는 없습니다. ‘주일에 경기를 뛰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금메달을 땄다’로 끝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그의 삶에는 또 다른 반전이 있었습니다. 리델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중국 톈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 살아갑니다. 리델은 중국인과 함께 12년간 어울려 살았고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주요 도시를 점령했던 때였습니다. 일제는 연합국 출신이던 리델까지 수용소로 끌고 갔습니다. 리델은 수용소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안타깝게도 뇌암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패망을 불과 6개월 남겨둔 시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리델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전히 주일성수가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선교사로서의 희생에 찬사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리델은 ‘한결같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육상 선수일 때도 선교사일 때도 언제나 주님을 의식하며 한결같이 살았습니다. 심지어 포로였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사도바울의 고백(롬 14:8)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주를 위해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다간 사람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한 주간도 힘내십시오.
1604년 8월 5일 ‘아메리칸 인디언의 사도’로 불리는 존 엘리엇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3600명이 넘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개종시키고 미국에서 최초로 인쇄된 책인 ‘베이 시편서’를 출판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협회도 설립했습니다.
도미니크수도회 창시자 별세
1221년 8월 6일 도미니크수도회의 창시자 도미니크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가장 어두운 죄, 즉 항상 순결했지만 나이든 여성보다 젊은 여성과 대화하는 것을 더 즐겼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너희 가운데 자선을 베풀고 겸손을 지키고 자발적인 청빈을 소유하라.” 불과 5년 전만 해도 그는 6명의 추종자가 있었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는 수천 명의 추종자가 있었다고 합니다.도미니크는 같은 탁발수도회를 설립한 프란치스코보다 12세 연상이었으나 수도회 설립은 늦었습니다. 도미니크는 정통신앙에 대한 설교와 교훈으로 수도회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채택하면서 가난과 탁발의 규칙을 채용합니다.
도미니크수도회의 공식 명칭은 ‘설교자 수도회’였습니다. 도미니크수도회는 처음부터 학문 탐구를 강조했습니다. 또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 뛰어난 학문을 갖출 필요가 있었기에 수도사들을 지적으로 훈련시켰습니다. 그 결과 뛰어난 신학자들이 배출됐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신학자들은 도미니크수도회에서 배출했습니다.
도미니크수도회의 주된 목표와 목적은 설교, 교훈, 교육, 그리고 신학 연구였습니다. 가난은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여러 수단 중 하나였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는 데도 주력했습니다. 초기에 무슬림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는 트리폴리의 윌리엄이었습니다. 스페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빈센트 페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개종 노력은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801년 8월 6일 미국 켄터키주 케인 릿지에서 열린 장로교 캠프 집회에 부흥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2만5000명이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집회는 제2차 대각성 운동 중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캠프 집회였습니다.
317년 8월 7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이자 337년부터 361년까지 로마 황제를 지낸 콘스탄티우스 2세가 태어납니다. 그는 생전에 이교도 제사를 불법화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독실한 아리우스주의자(그의 아버지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죄한 이단)였고 아타나시우스를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1560년 8월 7일 스코틀랜드 의회가 존 녹스가 주축이 되어 나흘 만에 작성한 칼뱅주의적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비준했습니다. 이 문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대체될 때까지 신앙고백의 표준으로 남아있었습니다.
1471년 8월 8일 네덜란드의 신비주의자이자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가 91세의 나이로 별세합니다. 그는 책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고 우리 마음의 어둠에서 벗어나려면 그리스도의 삶과 그분의 길을 본받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1788년 8월 9일 버마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성경을 버마어로 번역하고 최초의 ‘버마어-영어 사전’을 집필한 미국 침례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매사추세츠주 말덴에서 태어납니다.
70년 8월 10일 로마제국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뚫고 성전을 파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이전에 바벨론 사람들이 솔로몬 성전을 파괴한 날과 같은 날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작사가 별세
1886년 8월 10일 아일랜드 출신 찬송가 작사가 조셉 M. 스크라이븐이 별세합니다. 그는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찬송은 ‘죄짐 맡은 우리 구주’(369장)입니다. 이 찬송은 1855년 멀리 아일랜드에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작사한 것이며 한국 찬송가로는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 찬송가인 ‘찬숑가’에 수록됐습니다.가사는 총 3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죄 짐을 맡은 구세주는 좋은 친구이기에 걱정과 근심, 시험과 괴롬, 멸시와 조롱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해 참된 위로를 받자는 내용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위로이지만 그의 삶 속에 닥친 고통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크라이븐은 아일랜드의 시패트픽에서 태어나 트리니티대학을 졸업하고 약혼했으나 약혼녀가 결혼 하루 전날 익사합니다. 그 충격으로 1846년 캐나다 온타리오로 떠나, 우드스톡과 브랜트포드에서 가정교사로 일합니다. 그러다 한 여성을 만나 약혼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또다시 약혼녀가 사망합니다. 연속적인 비극을 당한 스크라이븐은 이후 플리머스형제단에 들어가 노인들을 돌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1519년 8월 11일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작성하도록 영감을 준 독일 도미니크회 사제 요한 테첼이 사망합니다. 그는 독일 전역을 다니며 면죄부 판매를 홍보했는데 “금궤에 동전이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은 뛰어오른다”는 악명 높은 설교를 했습니다. 이는 결국 교황 특사조차도 그를 비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루터는 한때 테첼을 “이 비극의 주범”이라고 불렀지만, 테첼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수사에게 위로의 편지를 썼습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당신이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요.”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