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엔 안 달린다” 100년 전 파리올림픽 영웅 ‘에릭 리델’, 명예의 전당에….

입력 2024-08-04 15:50 수정 2024-08-04 16:51
에릭 리델이 1924년 프랑스 파리올림픽 400m에 출전해 역주하고 있다. 리델은 이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국민일보DB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33회 파리올림픽에서 연일 태극전사들의 승전보가 들려오고 있다.

이미 파리에서는 1900년과 1924년에 각각 2회·8회 올림픽이 열렸었다. 육상 영웅 ‘에릭 리델(1902~1945)이 활약한 건 8회 올림픽에서였다. 54회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의상상, 음악상 등 4개 부문 수상을 한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이던 리델은 ‘주일에 뛰지 않는 남자’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아버지 덕에 톈진에서 태어난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영국 국가대표였던 리델은 100m의 유력 금메달 후보였다. 하지만 주일에 경기가 열리는 걸 안 뒤 출전을 거부했다. “주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법을 따를 뿐”이라는 말을 남긴 뒤 신앙적 소신을 지켰지만 그를 향한 비난은 날카로웠다.

영국 언론은 일제히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거나 “조국을 버린 위선자”라면서 그를 여론의 심판대에 세웠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월요일에 열리는 400m 출전권이었다. 하지만 리델의 주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를 신뢰했던 사람도 있었다. 경기 직전 팀의 물리치료사가 리델에게 쪽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사무엘상 2장 30절의 한 부분이 쓰여 있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성경 말씀이 힘이 됐던 것일까. 그 경기에서 리델은 47.6초 만에 400m를 주파했고 시상대 맨 위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행운은 이어져 200m에서도 동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그의 삶이 올림픽 영웅에서 끝났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리델은 육상 경기의 여러 기록을 뒤로하고 고향인 중국 톈진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회중교회 소속으로 런던선교회 파송을 받은 선교사 자격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따랐던 리델은 중국인과 함께 12년 동안 어울려 살았고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복음 안에 살던 그를 덮친 건 일제였다. 중국 주요 도시를 점령한 일제는 연합국 출신이던 리델까지 수용소로 끌고 갔다. 리델이 갇힌 곳은 웨이신 수용소로 이곳에서도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교사로 살았다.

하지만 고작 43세에 이곳에서 뇌암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일제 패망을 불과 6개월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다.

런던선교회 명예의 전당에 오른 에릭 리델에 대한 소개. 세계선교협의회 홈페이지 캡처

그의 숭고했던 삶은 후대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다.

그를 파송한 런던선교회는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 중국 최초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1782~1834) 바누아트 식인종에게 희생당한 존 윌리엄스(1796~1839) 등과 함께 리델 선교사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1795년 창립한 런던선교회는 1966년 세계선교협의회(CWM·총무 금주섭 목사)로 계승됐다.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세계 선교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CWM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를 비롯해 전 세계 32개 교단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리델의 금메달 100주년을 기념해 ‘에릭리델 금메달 100주년 기념사업회’ ‘CWM’ ‘에든버러대학교’ ‘영국육상연맹’ 등이 함께 지난달부터 예배와 무대극, BBC 라디오 방송, 평화의 정원 개막식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금주섭 총무는 4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에릭 리델의 감동적인 신앙과 기적적인 금메달 획득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 같은 이야기지만 무엇보다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이 숭고했다”면서 “수용소에 갇혀서도 일제에 맞서 교육 선교를 하다 순교한 그의 삶을 신앙의 후대가 알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금메달 100주년 기념행사와 100년 만에 다시 파리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그의 신앙적 삶을 다시 한번 회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