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죽지 않는다”…70대 목사의 보이스 피싱 극복기

입력 2024-08-04 12:50
'승리의 브이' 송정호 부천상동교회 원로목사가 4일 경기도 부천시 한 카페 앞에서 판결서를 들고 손으로 브이(V) 표시를 하고 있다.

4일 경기도 부천시 한 카페에서 만난 송정호(71) 부천상동교회 원로목사는 기자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은행 앱에 표시된 입금 내용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지난 3년간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지난달 29일 송 목사의 계좌에 89만5982원이 입금됐다. 이는 3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한 은행이 법원의 판결을 이행한 결과였다. 송 목사는 전화 금융사기로 큰 손해를 입었지만 변호사도 없이 법을 공부하며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건 2021년 10월 10일 오전 11시였다. 딸의 이름으로 수신된 문자 메시지에는 “아빠, 액정이 깨졌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휴대전화를 복구하기 위해 앱을 설치하고 송 목사의 통장에서 돈을 꺼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딸이 친구 집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한 송 목사는 아무 의심 없이 앱을 설치하고 주민등록번호와 비밀번호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는 전화 금융사기 사기였다.

다음 날 아침, 송 목사는 자신의 계좌에서 80만원이 인출되고 300만원의 대출이 이루어진 사실을 발견했다. “늦게 얻은 딸이라 애지중지 키운 딸입니다. 주로 통화보다 문자로 소통해왔던 터라 딸의 메시지에 의심하지 않았죠. 어처구니없는 일에 당했다는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송 목사의 목소리에는 당시의 당혹스러움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송 목사는 경찰서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구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을 발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본인 확인 조치를 확실히 해야 하며, 의심스러운 거래가 있으면 이체나 출금을 지연시키거나 일시 정지해야 한다. 이 과정이 빠졌다는 확신이 들었다.

2022년 1월 송 목사는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대상은 전화 금융사기에 활용된 은행이었다. 그러나 1심에서는 은행 측의 손을 들어줬다. 1심 법원은 은행이 비대면 실명확인 절차를 준수했다고 판단했다.

송정호 부천상동교회 원로목사가 4일 경기도 부천시 한 카페에서 법원 판결에 따라 은행이 입금한 내역이 적힌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패소 후에도 송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항소를 결심했다. 수차례 법원을 드나들었고 법을 공부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소비자기본법과 금융소비자보호법이다. ‘금융회사는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송 목사는 이를 토대로 항소 이유서를 썼고 서울고등법원은 송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특히 법원은 “2021년 10월 10일부터 11일 오전 9시까지의 거래를 그대로 넘어간 것은 이상하다”며 은행이 자체 점검을 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법원은 보이스 피싱에 사용된 대출이 무효임과 함께 피해액의 3분의 1을 송 목사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지난 5월 22일 사건 발생 후 2년 7개월 만에 송 목사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은행 측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지난달 31일 확정판결이 이뤄졌다. 송 목사는 “보이스 피싱으로 피해를 당한 고령층과 모바일뱅킹 취약계층에게 경각심을 높이고자 이 사건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 같은 은퇴자들은 대부분 모바일뱅킹 취약계층이다. 노인들이 혹여 비슷한 실수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대응법을 잘 찾아볼 수 있도록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피싱범도 금융사도 70대 노인이라고 우습게 봤을 텐데,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법정 투쟁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상대가 대형 금융기업이라는 점’을 꼽은 그는 “기업의 법률팀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평생 목사로 살아온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송 목사는 “300만원 정도의 금액이면 변호사 수임료가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넘어간다”며 “하지만 이렇게 하면 보이스 피싱범이 더 활개를 치고, 금융기업도 문제의 심각성을 낮게 본다.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학원까지 공부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이렇게 전화 금융사기를 당할 수 있다”며 “피해자들도 너무 자괴감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위로를 전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이 지난 3월 발표한 2023년 보이스 피싱 피해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 피싱으로 인한 피해액은 1965억원으로 전년(1451억원)보다 514억원(35.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이스 피싱 피해 금액 가운데 절반 이상은 50대(29%)와 60대 이상(36.4%)에서 발생했다.

부천=글·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