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영웅에게 일상을 선물했다… 아이디어 만난 AI

입력 2024-08-04 07:00
AI 크리에이터 '라이언오슬링'은 지난달 6일 현충일을 맞아 대한민국 영웅들이 맞이한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AI로 생성했다.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지난해 3월 해외 유튜버 데몬플라잉폭스(demonflyingfox)가 공개한 ‘해리 포터 바이 발렌시아가’(Harry Potter by Balenciaga) 영상은 AI(인공지능) 밈의 시초격으로 여겨진다. ‘해리 포터’ 시리즈 속 등장인물들이 프랑스 명품 브랜드 발렌시아가 의상을 걸치고 패션쇼를 펼치는 엉뚱한 영상은 4가지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을 동원해 제작됐다. 29일 현재까지 조회수 1264만회, ‘좋아요’ 30만건을 기록했다. AI 생성물이 처음으로 대중의 눈길을 끈 사례다.

유튜버 데몬플라잉폭스(demonflyingfox)가 공개한 ‘해리 포터 바이 발렌시아가’(Harry Potter by Balenciaga) 영상. demonflyingfox 유튜브 캡처

제도권에서는 생성형 AI로 만든 작품을 과연 예술로 볼 수 있는지,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두고 각종 논쟁이 뜨겁다. 그러나 AI를 발빠르게 받아들여 전에 없던 독특한 창작물들을 쏟아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은 이러한 철학적 논쟁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생성형 AI는 돈벌이 수단도, 인간이 독차지해 온 예술가의 지위를 위협하는 경쟁자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켜줄 도구이자 순수한 놀거리에 가깝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창작물은 벌써 하나의 장르이자 트렌드로 공고하게 자리잡았다. 각종 음식과 사물에서 인체의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제임스 게르데, 래퍼 칸예 웨스트의 ‘벌처스(Vultures)’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존 라프만 등 수많은 AI 아티스트가 이미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AI 기술이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창작자들의 작품 수준과 퀄리티도 덩달아 수직상승하고 있다. 지난 22일 디지털 아티스트 엘리엇 쿼츠가 공개한 ‘권력자들의 패션쇼(Power of Runway)’ 영상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프란치스코 교황, 일론 머스크 등 가상의 유명 인사들이 자연스런 몸짓으로 런웨이를 걷는다. 1년 반 전 데몬플라잉폭스의 작품 수준보다도 장족의 발전이 이뤄진 것이다.

‘권력자들의 패션쇼(Power of Runway)’ 썸네일. 엘리엇 쿼츠 유튜브(@InterdimensionalTV1) 제공

국내에도 이들에 필적할 만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AI 크리에이터들이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2만1000여명을 거느린 ‘라이언오슬링’(가명)은 국내 AI 창작 분야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카이스트 교수가 된 지드래곤의 모습을 AI로 생성한 가상의 이미지.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지난 6월 가수 지드래곤(본명 권지용·36)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초빙교수로 임용됐다는 보도가 나온 지 단 하루 만에 온라인상에서는 ‘권지용 카이스트 교수’가 각종 강의와 실험을 진행하는 사진이 퍼져나갔다. 라이언오슬링이 제작한 9장의 이미지 중 ‘수업 종료 후 대전역에서 성심당 빵을 포장해가는 지드래곤’의 모습은 특히 큰 화제가 됐다.

유튜버 침착맨과 모델 주우재가 뮤지컬 ‘시카고’ 넘버 ‘We Both Reached for the Gun’을 부르는 딥페이크 영상은 인스타그램에서만 125만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올렸다. 밑도 끝도 없이 아무렇게나 뻗어 나가는 극단적 상상력으로 헛웃음을 자아내는 게 그의 작품세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가상의 이미지로나마 실현시켜 감동을 선사한다. 국민 판다로 사랑받은 푸바오가 중국으로 반환되던 지난 4월 3일, 강철원 사육사의 손을 잡고 유채꽃 길을 걷는 푸바오의 뒷모습을 그려 팬들의 애틋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국민 판다로 사랑받은 푸바오가 강철원 사육사의 손을 잡고 유채꽃길을 걷는 모습. AI 크리에이터 '라이언오슬링'이 생성한 가상의 이미지.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지난 현충일 공개된 ‘대한민국 영웅들이 맞이한 평범한 일상’ 게시물이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투쟁이 아닌 일상에 중점을 두고 재해석하면서 “AI 기술의 순기능을 보여줬다”는 찬사를 받았다. 끝내 국가보훈부 홍보 담당자의 눈에 띄면서 협업 콘텐츠 제작까지 성사됐다.

라이언오슬링 인스타그램(@ryan_ohsling) 캡처

그런 라이언오슬링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본업은 따로 있고, AI영상물은 그저 ‘개인적 취미’라는 그의 이야기를 지난달 1일에서 26일까지 이메일을 통해 여러차례에 걸쳐 들어봤다.

다음은 라이언오슬링(가명)과의 일문일답.

-정체가 궁금하다.
“본업은 따로 있다. ‘라이언오슬링’ 계정은 개인적인 취미로 운영하고 있다. 협업 게시물 외에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콘텐츠로 얻는 수익은 전혀 없다. 자세한 신원 정보는 적절한 시기에 공개할 예정이라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다. 양해 부탁드린다.”

-가명은 왜 하필 ‘라이언오슬링’인가.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바꾸려고 마음먹은 시기에 마침 넷플릭스에서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출연한 영화 ‘그레이맨’을 봤다. 라이언 고슬링 이름에 제 성씨인 ‘오’를 붙였다. 큰 의미 없이 정말 단순하게 정한 이름이다.”

대전광역시의 유명 제과점 성심당을 밈으로 활용한 AI 이미지.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AI 툴을 접하기 전에도 창작 활동을 했나.
“원래 그림이나 디자인, 영상 등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생성형 AI를 처음 접한 건 지난해 8월쯤이다. 이전에 써왔던 프로그램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취미로 생성한 이미지들을 인스타그램에 재미 삼아 올려본다는 게 여기까지 왔다.”

-어디서 영감을 받나.
“제 주변의 모든 것이 영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수많은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 그릇을 키우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다. 또 워낙 여러 장르의 콘텐츠를 좋아한다. 모든 예술가를 존경하지만 한 명만 고르자면 릭 루빈(제이지, 아델,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샤키라 등과 작업한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을 꼽고 싶다.”

-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초기에는 달리(DALL·E)를 주로 썼다. 지금은 미드저니, 어도비 파이어플라이, 스테이블 디퓨전, 컴피UI, 피카, 루마 등 다양한 툴을 사용한다. 원하는 결과물에 따라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달라진다. 각 툴마다 매력이 달라 주제에 맞춰 적절한 툴을 선택한다.”

AI 크리에이터 '라이언오슬링'의 '침착맨 버전 시카고’ 영상 중 일부.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가장 만족스러웠던 콘텐츠는.
“최근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건 ‘2024년 여름 헤어스타일 트렌드’와 ‘침착맨 버전 시카고’ 릴스 영상이다. 저는 어이없게 웃긴 유머를 좋아하는데, 이 두 콘텐츠에 그런 포인트가 잘 녹아든 것 같다.”

-현충일 기념 콘텐츠가 큰 히트를 쳤다.
“이 정도까지 화제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현충일 게시물을 만든 시기는) 제 콘텐츠가 사랑받기 시작하고 한창 팔로워가 늘어나던 때였다. (제 계정이) 웃기고 유쾌한 AI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맞지만, 그 외에도 훨씬 넓은 주제로 다양한 AI 콘텐츠를 꾸준히 시도하는 중이었다. 이 시점에서 제가 가진 기술로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AI 크리에이터 '라이언오슬링'은 지난달 6일 현충일을 맞아 대한민국 영웅들이 맞이한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AI로 생성했다.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그동안 제가 제작한 콘텐츠들의 공통점은 ‘기존에 있던 이야기의 연장선을 이미지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몇 가지 눈에 띄는 지점을 발견했다. 독립운동가를 대표하는 사진은 대부분 의거를 행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촬영했거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것이더라. 그리고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은 너무 젊었다. 독립유공자분들 덕에 지금 우리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고, AI 기술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평범한 일상을 재현함으로써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국가보훈부와 콜라보도 성사됐다.
“앞선 현충일 콘텐츠를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셨다. 국가보훈부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6·25 전쟁 기념일을 맞아 협업 콘텐츠를 제작하게 됐다.”

AI 크리에이터 '라이언오슬링'과 국가보훈부의 협업 콘텐츠. 6·25 전쟁과 호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이미지를 AI로 생성했다.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AI 창작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는데.
“충분히 공감한다. 저 역시 생성형 AI가 등장하기 전부터 창작 활동을 해왔던 사람이다. AI 기술로 작업을 할 때면 매번 그 편리함에 감탄한다. 인공지능을 통한 창작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창작자들이 AI를 적절히 활용해 더욱 우수한 작품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할 생성형 AI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지금의 기술도 충분히 놀라운 수준이다. 텍스트를 입력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에만 있던 이미지를 뚜렷하게 생성해내는 건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점에서 발전을 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 세계 여러 AI 기업들의 개발진들이 저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본다. 지금은 여러 AI 기반 기업들이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콘텐츠 크리에이터들보다는 기술력 자체에 대한 이슈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린다. 기술 자체의 발전에 대한 기대보다도, 인공지능 관련 법적 문제들이 빨리 개선되어 AI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줄어들길 바란다.”

-원론적인 질문도 하나 드리겠다. AI 창작도 예술일까.
“저는 예술을 잘 모른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결국 관객의 해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AI가 만든 작품도 충분히 예술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술의 정의가 시대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해온 걸 보면 AI를 통한 창작도 언젠가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AI 창작물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예술적 논의를 끌어낸다면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지 않을까.

AI 크리에이터 '라이언오슬링'의 초기 작업물. 라이언오슬링(@ryan_ohsling) 제공

또 한편으로는 예술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창의성’이라고 생각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분석한 AI 창작물은 인간의 예술적 감각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창의적인 영감이나 감정을 반영하진 못한다. AI 창작은 ‘AI 예술’일 수는 있다. 다만 그냥 ‘예술’과는 조금 다르다.”

라이언오슬링은 “그리고 저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그냥 창작 활동을 하는 크리에이터”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는.
“제 콘텐츠가 생각보다 빠르게 여기저기로 퍼지고 있어 정말 뿌듯하다. 제 작품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존재는 제게 늘 큰 힘이 된다.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AI 콘텐츠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가는 이 시기에 제가 주목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작한 콘텐츠와는 또 다른 형태의 작품을 구상하는 것도 계획 중이다. 온라인에만 머물러 있는 AI 콘텐츠의 한계를 넘어서, 오프라인 공간으로도 그 경험을 옮겨오고 싶다. 시간 날 때마다 구상하고 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

천양우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