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친 홈리스가 대학 학식 먹으며 품은 수줍은 꿈

입력 2024-08-01 10:13 수정 2024-08-01 10:42
31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 미래관에서 열린 희망의 인문학 강연 모습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는 처음인 거 같네요. 무언가를 시작할 땐 두려움 때문에 종종 피하곤 했어요.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회피 대신 정면 승부를 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내년이면 일흔 되는 옥모씨가 31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숭실대 벤처관 3층에서 기자와 만나 전한 이야기다. 그의 말과 표정에선 그간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살아간 삶에 대한 기대가 묘하게 뒤섞여 보였다. 옥씨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과 서울시가 시행하는 ‘2024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여한 수강생 중 한 노년 남성이다. 그를 포함한 희망의 인문학 수강생 60여명은 이날 숭실대에서 방학으로 빈 강의실을 각자의 사연으로 채워갔다.

성별, 나이, 지금껏 지나온 삶의 모양이 각기 다른 수강생들은 서울 전역의 노숙인 재활 시설이나 쪽방 거주자 대상 상담소, 공공 근로자 대상 자활 센터 등을 통해 이번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이들은 평양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 근대 대학인 숭실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의미를 담아 나누어진 ‘평양’ ‘서울’ ‘백마’ 등 3개 반에서 7월 초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인문학 강연을 듣고 있다. 이날은 ‘18세기 과학과 세계관의 변화’ ‘김사량의 소설 빛 속으로 속 민족 정체성 찾기’ ‘오늘날 되새겨 보아야 할 우리 사회의 익숙한 가치들 : 자유, 평등, 노동’을 주제의 강연이 오전 2시간가량 진행됐다.

수업 시작인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 강의실엔 수강생 대부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두꺼운 교재와 간식 봉지를 하나씩 받아들고서다. 자리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거나 교재를 미리 뒤적거리는,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자활 근로를 하는 공공기관의 이름이 새겨진 조끼를 입은 한 중년 남성도 그랬다.

31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 미래관에서 열린 희망의 인문학 강연 모습

수강생 대부분에게 인생에서 첫 대학 강의이기도 했다. 수업 도중 휴대전화 벨이나 알람이 울리기도 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뒤로 젖혀진 이도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는 강사의 진도에 맞는 교재를 펴고 펜으로 무언가를 분주하게 적어 내려갔다.

백마반에서 이날 강연을 들은 40대 후반 여성 표모씨는 고시원에서 살며 한 노숙인지원센터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 수업은 난생처음인데 선생님이 쉽게 설명해 주셔서 좋다”고 했다. 대학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방학이지만 학교에 들른 대학생들 사이에서 구내식당 ‘학식’을 먹을 때 잠시 대학 생활을 느끼게 되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고 수줍게 웃었다. 그는 “거주 환경을 좀 더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작은 꿈이 생겼다”며 공공임대주택에 지원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기자에 전했다.

코로나 대유행하기 전인 2020년까지 주거취약계층의 자립을 돕기 위해 발행되는 잡지 ‘빅이슈’에서 ‘빅판(빅이슈 판매원을 부르는 애칭)’으로 일한 안모(52)씨도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는 “빅판일 때 중앙대 앞에서도 잡지를 판 적이 있는데 그때 학생들을 보고 ‘아, 나는 부모님 말씀을 안 들어서 대학엘 못 왔지’하는 안타까움이 좀 있었다”며 “대학 강의를 들을 기회가 생겨 설레고, 대학에 오는 것이 삶의 작은 활력이 된다”고 말했다. 임대주택에 거주하며 2년째 자활 근로를 하는 안씨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하고 싶다는 계획을 공유했다.

40대 초반인 한 남성 수강생은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 진학을 꿈꾸고 있다. 그는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될까 하는 희망으로 이번 인문학 강연을 신청했다”며 “나중엔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 희곡을 쓰는 창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31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 미래관에서 열린 희망의 인문학 강연 모습


오전 인문학 강연을 마치고 점심 이후 수강생 전원은 ‘음악을 통한 공감과 치유’라는 주제의 행사에 참여했다. 신나는 노래에 맞춰 북, 탬버린, 귀로 등 각자 맡은 악기치고 흔들며 한바탕 웃었다.

이번 과정의 책임자인 장경남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장은 “누구나 다 아는 고전 소설의 심청이 춘향이 홍길동 등 주인공처럼 우리의 삶 속엔 모두 고난의 서사가 있다”며 “삶에서 고난을 겪고 계시는 분들에게 마음의 힘을 기르고 위로와 희망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소설 ‘빛 속으로’를 주제로 수업한 이경재 숭실대(국문과) 교수는 “작품 선정이나 설명에 위로와 희망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며 “수강생 중 한 분이 수업을 마친 뒤 일본에서 고초를 겪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말을 하시는 것을 듣고 이번 인문학 강연이 그분들의 실존적 삶과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한 거 같아 뿌듯했다”고 했다.

7월 초 3회 연속 철학 강연을 진행한 숭실대 신응철 학술연구교수는 “지금껏 무학으로 살아온 한 70대 여성 수강생분이 ‘대학에서 인문학 강연도 들어보고, 이제 소원이 없다’고 한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강연을 통해 삶 전체가 변화하긴 어렵겠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각자의 상황에서 무언갈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와 의지를 불어넣어 주길 바란다. 그것이 기독 사학이 할 수 있는 봉사와 나눔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글·사진=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