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씨 속에 평안하신지요?
7월도 이제 사흘 남았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시간이 빨라지는 걸까요. 날은 덥지만 시간은 왠지 더 빨리 지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올해 결심했던 계획과 일상의 루틴을 지속하기를 바라봅니다.
최근 저희는 사무실 책상 위치를 바꾸는 작업을 했습니다. 늘 일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위치에 사무실 집기를 배치했습니다. 아, 그렇다고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을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공간에서 자리만 재배치한 것입니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책상과 의자를 놓고 짐을 쌌다가 다시 풀러 쓰던 용품을 다시 배치하자 신기하게도 마음가짐도 새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뭔가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다짐 같은 게 생겼습니다. 일이 손에 잘 안 잡히고 결심이 흔들린다면 책상을 한번 옮겨보는 것도 극복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주에도 다양한 인물들의 얘기가 펼쳐집니다. 주로 영미권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삶에서 교훈을 찾으면 좋겠네요. 건강하고 평안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1775년 7월 29일 미 육군이 군목을 창설합니다. 최초의 군목은 미국 성공회(Episcopal Church) 새뮤얼 프로부스트(1742~1815) 주교입니다. 대륙의회는 군목협의회를 창설했고 프로부스트를 최초의 군목으로 선출했습니다. 군목에게는 월 10달러의 급여와 말 한 마리 분의 사료를 제공했습니다.
1794년 7월 29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개조된 대장간에서 노예였던 리처드 앨런이 지역 감리교 성공회에서 차별을 받던 흑인 기독교인들을 모아 단체를 결성합니다. 이들은 현재 전 세계에 알려진 아프리카 감리교 성공회의 모교회인 베델 아프리카 감리교 성공회를 설립했습니다.
윌리엄 펜의 ‘거룩한 실험’
1718년 7월 30일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펜실베이니아를 퀘이커교도들의 식민지로 설립한 윌리엄 펜이 사망합니다. 윌리엄 펜은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로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어강 서안 땅에 대한 지배권을 허가받자 그 땅을 펜실베이니아라 명명하고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신앙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총독과 양원제의회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스스로 총독이 되어 필라델피아를 건설해 원주민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펜은 퀘이커교의 창시자였던 조지 폭스의 추종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해군 제독이었던 그의 부친은 그에게 최고의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펜은 학창 시절 청교도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서 공부하면서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667년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퀘이커 신도가 됐습니다. 부친은 이런 아들을 ‘광신도’라며 쫓아냈고 펜은 고집을 꺾지 않아 런던탑에 7개월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부친과 친구들의 중재로 석방됐고 여러 해 동안 가족을 돌보며 퀘이커파를 옹호하는 글을 집필합니다.
이때 그는 ‘거룩한 실험’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미국 식민주에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실시하는 새로운 식민지를 설립하고자 했습니다. 펜이 제안한 것은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새로운 식민지였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미 국왕에게서 양도받은 토지를 다시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대금을 지불하고 구입하려는 펜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원주민들과 정착민들 사이에 화해 관계를 수립해 서로 무력에 의해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도록 했습니다. 그의 거룩한 실험의 중심지는 ‘필라델피아’ 즉 형제애의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펜은 펜실베이니아의 초대 총독으로서 인디언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평화로운 정착의 꿈은 실현됐습니다. 그의 ‘거룩한 실험’ 일부였던 종교의 자유는 마침내 미국뿐 아니라 수많은 국가의 헌법에도 자리 잡았습니다.
1566년 7월 31일 신대륙에서 최초로 서품을 받은 스페인인이자 ‘인디언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가 스페인에서 별세합니다. 그는 스페인 정착민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저지른 끔찍한 일을 자세히 기록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인디언을 어린아이 또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묘사한 많은 동포들에 맞서 현지 원주민들의 인간성을 주장했습니다. 1510년 주교가 된 그는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로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산토도밍고 쿠바 멕시코 등지에서 인디오에게 선교하고 그들을 위해 베네수엘라에 이상적인 식민지를 건설해보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인디언 보호법을 제정했고 식민자의 불법 행위와 인도회사의 횡포 등을 평생에 걸쳐 고발해 이를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1567)라는 저서로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디언들을 보호하기 위해 흑인 노예를 도입하는 방법을 카를로스 5세에게 진언해 이후 흑인 노예제 정당화의 근거로 역이용되기도 했습니다. 1547년 귀국해 ‘서인도의 역사’ 등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저서를 펴냈습니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1834년 8월 1일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이 52세의 나이로 별세합니다. 1823년에 완성된 영국인의 성경 번역본은 23권으로 채워졌습니다. 모리슨은 영국 런던선교회에서 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입니다.1807년 마카오에 입국해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역사로 1834년까지 근무하면서 1818년 말라카에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우고 인쇄소를 설립, 정기간행물을 발행했습니다.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광둥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중국어사전’, 한역 신구약성서인 ‘신천성서(神天聖書)’ 등을 남겼습니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의료 선교사 그렌펠
1892년 8월 4일 영국의 의료 선교사 윌프레드 T. 그렌펠 경이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에 도착합니다. 그는 42년 동안 의사이자 선교사로 활동하며 고아원, 병원, 협동 상점 및 기타 지역사회 단체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런던대학을 졸업한 그는 1888년 의사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1907년 옥스퍼드대에서 최초의 명예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885년 미국에서 온 전도사 D. L. 무디의 영향을 받아 1888년 왕립 원양어부선교단에 참가, 수년간 의료 선교에 힘썼습니다. 1892년 라브라도르 연안 어민의 의료 선교사로 선임돼 첫 2개월간 900명을 진료했습니다. 그의 업적으로 의료뿐 아니라 교육과 사회복지 사업에도 정부가 원조하게 되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