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는 쉬면서 일하라? 죽을만큼 더워도 눈치만…”

입력 2024-07-26 05:00
자료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너무 더워서 휴게공간에 쉬려고 해도 5분 이상 작업이 확인되지 않으면 개인 단말기로 호출하거나 방송으로 불러냅니다. 5분은 넓은 물류센터에서 화장실 다녀오기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배송 마감시간을 못 지키면 해고에 다름없는 패널티를 받습니다. 폭염·폭우에 ‘오늘도 배송하느냐’고 물으면 업체는 ‘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쉴 수 있는 노동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매년 극심한 폭염과 사투를 벌이는 건설·택배·물류센터·급식 노동자들이 25일 국회 토론회에서 열악한 근무 환경을 전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노동계와 전문가들은 작업중지권의 실효성 확보, 사업주에게 적정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의무하는 내용 등의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폭염 속으로 출근… 휴식 권고는 유명무실
이정식(왼쪽부터) 고용노동부장관과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이 지난 16일 오후 인천 서구 제물포금속을 찾아 폭염·호우 대응 고열사업장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뉴시스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와 더불어민주당 의원 8명은 이날 국회에서 ‘폭염 속 노동실태 및 제도개선’ 토론회를 열었다.

현장 증언에 나선 공공운수노조 쿠팡물류센터지회의 최효 조합원은 이날 “쿠팡 물류센터는 건축법상 창고시설이고 냉난방이나 소방시설에 대한 규제가 없다”며 “휴게시간도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체감온도 33도 이상일 때 매시간 10분, 35도 이상일 때 매시간 15분 휴식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최 조합원은 물류센터 층별로 지급하는 휴게시간이 다르고, 식사 시간을 쪼개서 하루 한 번 휴식시간을 지급하는 등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천 지역 물류센터 현장 설문조사에선 “에어컨 있는 간이 쉼터는 눈치 보여서 못 들어가고 정말 죽을 것 같다”며 “온습도계가 실제 작업 공간이 아니라 큰 선풍기가 있는 넓은 공간에 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쿠팡 배송기사로 일하고 있는 권순규 전국택배노조 쿠팡CLS지회 조합원 역시 “배송해야 할 물건을 가져오는 터미널은 대부분 선풍기 정도만 있고, 열악한 시설에서 차량 적재를 마치고 배송을 시작하면 폭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택배기사들이 차량 안에 머무는 시간보다 배송을 위해 야외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길고, 폭염·폭우 같은 악천후에서 작업중지를 요청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대표적인 폭염 취약 직종인 건설노동자의 증언도 이어졌다. 야외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은 주로 철로 된 자재를 다루고, 안전모 등 전신에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있어 온열질환 발생 가능성이 크다.

전재희 전국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지난해 노조에서 진행한 건설현장 체감온도 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기상청이 발표하는 체감온도와 현장 온도는 평균 6.2도 차이 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건설 경기 침체에 폭우까지 겹친 상황에서 폭염지침은 지키면 손해, 안 지켜도 그만”이라고 강조했다.

학교급식 조리사로 일하는 신명희 공공운수노조 교육공무직본부 조합원 역시 “한증막을 연상케하는 급식실에서 땀범벅으로 튀김을 만들면 탈수가 온다”며 “한여름 폭염은 조리 노동자의 생존 문제와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작업중지권 개선 필요 …사업주 의무 강화해야"

발제와 토론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기후위기로 극단적인 기후현상이 빈번해지는 만큼 작업중지권 요건에 고열·한랭으로 인한 신체 위험을 명시하고, 사업주의 보건 조치 의무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귀연 노동권연구소장은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급박한 위험’에 폭염이나 폭우 같은 기상재해가 포함되는지 불명확하다”고 짚었다. 장 소장은 또 “불안정노동의 경우 작업중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며 “건설노동자는 폭염기에 오후 작업을 중지하면 일당이 깎이기 때문에 작업하지 못하는 시간에 대한 임금 보전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로빈 공공운수노조 전략조직차장도 “폭염 등으로 인한 고온·고열을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의 보건조치 대상으로 추가하고, 작업중지권 사용요건에 고열·한랭을 추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축법 개정을 통해 물류센터를 창고시설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의 문은영 변호사는 “다수의 해외 입법례를 보면 작업장의 적정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의무를 사업주에게 부과하고 있고, 일부 국가는 아예 구체적인 온도까지 규정하고 있다”며 “최근 수년간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제도개선 연구가 진행된 만큼, 이제는 법 개정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