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달력 제조업체 진흥문화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사무실 책상에 놓인 주보였다. 주보는 이 회사 직원들이 매주 월요일 오전 8시30분에 드리는 예배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첫 장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는 말씀이, 그다음 페이지엔 예배 순서 등이 적혀 있었고 뒷장엔 ‘인사발령’ ‘휴가 일정’ ‘중보기도’ 같은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진흥문화를 찾은 것은 이 회사 설립자인 박경진(84·서울 꽃재교회) 장로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그는 주보를 엮어 만든 단행본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곧 우리 회사의 역사”라고 소개했다.
“예배를 드릴 땐 직원들과 성경을 한 장씩 교독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 모든 직원이 성경을 다 읽게 되더군요. 언젠가 성경 완독을 기념해 떡을 준비해 잔치를 열기도 했어요(웃음).”
교계에서 박 장로는 꾸준히 나눔의 뜻을 실천한 기업가로 유명하다. 그는 사업을 통해 일군 부를 꾸준히 세상에 흘려보냈다. 1996년부터 개최한 해외 입양아 모국 초청 행사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가 퍼진 이후 중단된 상태이지만 팬데믹 전까지 매년 평균 20명 안팎의 입양아가 박 장로 덕분에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2주간 서울의 고궁이나 대학 캠퍼스 등을 둘러보며 정체성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박 장로는 “해외로 입양됐던 이들이 행사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에 갔다가 입양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누군가 그러더군요. 한국은 우리를 쓰레기처럼 버린 나라라고.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모국 초청 행사를 열게 된 거죠. 돈이 많이 들어갔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박 장로는 진흥장학재단을 세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14년간 400명 넘는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금 누적액은 거의 10억원에 달한다. 지난 2월 진흥문화 사옥에서 열린 제14회 장학금 수여식에서 박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진흥장학재단을 통해 기독교의 나눔 정신을 소박하게 실천하고 싶었다”고.
1940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박 장로가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51년이었다. 당시 동네 초등학교엔 피란민이 모여들곤 했는데, 어느 날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당시 열한 살이던 박 장로는 호기심이 생겼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불 보따리만 들고 피란을 온 사람들이 열심히 찬양하면서 우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교회에 가게 됐죠.”
그즈음 유년기를 보낸 대다수 한국인이 그렇듯 그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 항상 끼니를 걱정했다. 69년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에 상경한 뒤에도 가난의 터널은 길기만 했다. 10년간 이사를 25번이나 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76년 서울 중구 을지로 방산시장에 진흥문화를 설립한 뒤에도 생활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는데, 80년대가 되면서 서서히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당시 성공의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은 그때까지 한국에 거의 없던 성화 캘린더였다.
“진흥문화는 성화 캘린더의 원조이자 독보적인 회사였어요. 사업이 잘되면서 달력 업자들 사이에 소문이 났어요. 50cc 오토바이 타고 다니던 박경진이 성화 달력으로 신설동에 빌딩을 올렸다고(웃음). 그러면서 저를 따라 성화 캘린더를 만드는 사람도 늘어났죠.”
2015년 진흥문화 창사 40주년을 앞두고 발간된 책자인 ‘진흥창사40주년’에는 이 회사가 일군 성과가 정리돼 있다. ‘진흥성화카렌다 생산 260만부 돌파’(92년), ‘일반 기업체용 340만부, 성화 300만부 등 카렌다 640만부 제작’(95년), ‘진흥빌딩 및 성수동 공장 증축’(98년)….
박 장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며 “돈 버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돈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가 2010년 펴낸 자서전 ‘오직 감사’를 건넸다. 자서전의 첫머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예수를 믿으면 인생의 역전을 경험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감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글·사진=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