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호 목사·보길도 동광교회
이곳 섬사람들은 이웃 섬마을에 시집을 와서 평생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모두 어릴 적부터 섬 문화에 젖어 있습니다. 언어 음식 등 모든 생활 습관이 비슷하고 부모 대대로 어릴 적 어떻게 사랑하는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가정이 그렇듯 아버지의 술주정과 엄마를 구타하는 모습을 보고 살아온 아픈 마음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자녀들이 태어나도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 바르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평생을 남편과 살면서 한 번도 “수고했네” “고맙네” “사랑하네” 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5년 전 교회를 개척하면서 바로 옆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 성함이 김동님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섬마을 끝인 구목리에서 시집을 왔는데 남편은 땅 한 평 없지만 그 시절 완도중학교를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정아버지는 우리 집안에도 학벌 있는 사위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할머니 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명령은 거부할 수 없었고 고무신 신고 걸어 15시간 걸리는 산 고개를 몇 개 넘어 지금의 이 마을 새색시로 오셨습니다.
소문대로 할아버지는 학식이 있어 동네 이장을 20년 장기 집권하시며 온갖 마을의 행정 일을 도맡으셨습니다. 동네 아이들 이름도 지어주고 출생신고를 비롯해 마을 대소사를 다 해결하신 어른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라 하면 죽도록 반대를 하셨다고 합니다. 두 분 사이에 자녀가 없어서 할아버지는 옛날 조선 시대에나 있던 씨받이, 그것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을 통해 딸을 하나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아이도 시각장애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나중에 불쌍한 그 딸이 어렵게 시집을 갔는데 또 장애 2급의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이처럼 가슴 아픈 인생에 또 하나의 짐을 짊어지고 있답니다. 제가 할머니를 처음 만난 그해 추석 명절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일주일간 심한 고열로 앓고 계셔서 보살펴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다가온 설 명절에도 같은 증세로 누우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절마다 외로움과 서러움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세상에 없으면 좋을 명절 병(증후군)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네 할머니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자기 큰딸이 50만원, 작은딸이 100만원을 보냈다며 자랑하는 통에 할머니의 복창이 터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늘 아프신 할머니를 모시고 해남 병원과 목포 병원, 안 되면 광주의 전남대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사 소견은 모두 다 정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왜 아프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늘 꿈에도 소원이 빨리 죽고 싶다는 말씀밖에는 안 하십니다. 죽는 것이 소원인 가련한 이 할머니를 교인이 아닌 이웃으로 하나님은 붙여 주셨습니다.
어느 날은 보일러 기름도 겨우 한 드럼통만 사시고 그 기름 다 타기 전에 죽겠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주름지고 거북손 같은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그날은 진심으로 낙도 사람들을 돕겠다며 큰소리치며 이곳에 온 저 자신의 무력함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할머니께서 흘린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때 상여를 메고 마을에서 나오는 나인성 과부를 보시고 눈물을 보이시며 그 아들을 살려 어머니께 돌려보내 주셨던 예수님의 능력이 생각났습니다.(눅 7:11~17)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머니께 힘이 될 수 없었던,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이 같은 처지의 가난하고 불쌍한 섬사람들을 수없이 만나 손을 잡아야 하는 저로서는 무능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날은 제 작은 믿음을 놓고 밤새 아파하며 저 자신을 고치고 부수기를 반복했습니다.
능력도 기적도 심금을 울리는 설교도 할머니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 앞에 슬피 울며 죽는 날만 소원하시는 그 할머니를 제힘으로는 도와드리지 못해 결국 글을 모르는 이 할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드리기 위해 주기도문을 크게 써서 벽에 붙여놓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이렇게 김동님 할머니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주기도문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