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에 들어가면 아버지만 보일 것 같아요. 저랑 똑 닮은 사람이 저를 향해 이리저리 코치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 텐데, 바로 알아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한국 태권도 남자 국가대표 최초로 올림픽 겨루기 중량급(80kg 이하)에 출전하는 서건우(21·한국체대)는 지난 2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가족들을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5살 때 아버지가 운영하는 태권도장에서 처음 도복을 입은 서건우는 걸음마를 떼자마자 발차기를 배우고 예도를 익혔다. 그를 따라 주니어 무대를 주름잡는 태권도 선수로 성장 중인 두 여동생까지, 이번에는 ‘태권도 DNA’로 묶인 온 가족이 파리에 와 응원전을 펼 예정이다.
각종 타격 기술, 훈련 방식, 몸에 밴 사소한 습관까지 아버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국내 대회에 나갔다가 “관장 아들이 왜 이렇게 못하냐”는 소리를 듣고 오기가 생긴 그는 아버지의 지독한 훈련을 견디며 이 자리까지 왔다. 서건우는 “중고교 시절에는 학교에서도 운동량이 많은데 아버지가 집에 와서도 따로 개인 훈련을 시켰다”며 “그때는 솔직히 너무 싫었지만 이제 와 보니 그만큼 실력이 늘었던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한국 태권도의 약체 종목인 중량급에 도전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다. 서건우는 “아버지가 체중 감량을 많이 하면 선수로서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조언하셨다”며 “고3 때 이 체급에 정착해 자신감을 갖고 하다 보니 올림픽까지 나갈 수 있게 됐다. 이 체급에 처음 출전하는 한국 선수로서 1등을 해서 길을 잘 열고 오겠다”고 말했다.
체격이 좋은 해외 선수들을 쓰러뜨리고 얻은 귀중한 올림픽 출전권이다. 이번 올림픽에선 랭킹 4위 서건우의 경쟁 상대로 요르단의 살레 엘샤라바티(5위)와 이탈리아의 시몬 알레시오(1위)가 꼽힌다. 서건우는 “살레는 순발력이 좋고 앞발 공격이 빨라서 위험하다”며 “최근 발차기 감을 살리는 훈련을 하고 있다. 신장이 큰 선수들을 피해 짧은 거리에서 공격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세계 1위 시몬 역시 넘어야 할 산이다. 서건우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그 선수랑 붙어봤을 때도 해볼 만한 상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며 “강한 상대지만 공격에 강약 조절을 하면서 천천히 기회를 노려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한국 태권도가 ‘노골드’에 그쳤기에 이번엔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세워야 한다. 서건우는 “‘한국 태권도가 위기’라는 말을 오히려 동기 부여하는 데 쓰면서 훈련하고 있다”며 “지켜봐달라”고 전했다.
이창건 태권도 대표팀 총감독 역시 서건우를 대표팀 다크호스로 꼽았다. 이 감독은 “파리에선 서건우가 사고를 칠 것 같다”며 “훈련 욕심도 많고 신체 조건이 유리한 상대를 만나도 끝까지 몰아붙이는 체력을 갖췄다”고 말했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