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유사 ‘때리기’에 나서면서 업계가 울상을 짓고 있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제도권의 견제까지 더해지며 부담이 크다는 호소다. 정부·여당은 물가 관리에 협조하라며 제품 가격 인상을 억누르고,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정유 업계를 겨냥한 횡재세 도입을 벼르고 있다.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은 지난 16일 석유업계 간담회를 열고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 대표를 만나 정유제품 가격 인상 자제를 요구했다. 최 차관은 “지난 4월 이후 물가 상승세가 둔화했지만 체감물가는 여전히 높은 상황”이라며 “정유사들도 과도한 가격 인상은 자제하고 석유 가격 안정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함께해달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런 요구를 하는 배경에는 지난 1일부터 축소한 유류세 인하율이 있다. 인하율 축소로 휘발유 가격은 ℓ당 약 41원, 경유는 약 38원, LPG는 약 12원씩 인상 요인이 발생했다.
정유 4사는 석유제품 공급가격 인상 및 직영주유소 판매가격 인상을 최소화하겠다며 호응했다. 하지만 속내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현재 시장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초 고공행진했던 2분기 들어 반토막 났다. 정제마진은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비 등 비용을 뺀 값으로, 정유업계 핵심 수익성 지표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배럴당 3.5달러로 손익분기점(4~5달러)을 밑돌았다. 중국 인도 중동 등에서 정제시설을 늘리면서 공급은 늘었는데 여름 ‘드라이빙 시즌’ 수요는 예상보다 부진한 결과다.
허세홍 GS칼텍스 대표는 최 차관과의 간담회 후 취재진과 만나 “2분기 실적은 1분기보다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하반기 경영 키워드는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자’로 정했다”고 밝혔다. 정부의 가격 인상 자제 요청에 대한 정유사의 부담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유사 실적이 악화한 상황에도 야당은 횡재세 도입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있다. 횡재세는 정유사가 에너지 가격 등락 등 외부 요인으로 초과 이익을 거둔 금액에 대해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다. 21대 국회에서도 야당 주도로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가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지난 4월 이재명 대표가 물가 상승으로 인한 민생 부담을 나누자며 횡재세 도입을 재차 주장한 바 있다. 정유 업계는 민주당이 지난달 횡재세와 유사한 효과를 내는 ‘서민금융지원법’을 당론으로 정해 은행을 겨냥한 데 이어 자신들의 수익을 노린 법안도 통과시킬 것으로 보고 불안해하는 분위기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18일 “예대마진을 통해 무조건 이익을 내는 구조로 설계된 은행과 달리 정유사는 환율, 유가, 경기 등 변수에 따라 정제마진이 손익분기점을 하회하는 경우가 잦다”며 “은행과 정유사를 동일 선상에 놓고 제도를 설계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가격 인상 자제 요청에 대해서도 “정유 업계의 협조만 구할 게 아니라 신사업, 탄소 배출 감축 등 비용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미래 과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도 함께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