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빛의 화가가 주는 교훈

입력 2024-07-15 05:44
안녕하세요. 더미션 독자 여러분, 새로운 한 주를 맞습니다. 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번 한 주도 건강하고 평안한 가운데 보내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요즘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지는 무엇일까요. 과거엔 주일 아침 예배당으로 가는 분들이 성경과 찬송을 손에 들고 갔지요. 또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헌금을 드리기 위해 전날 은행에서 새 지폐로 바꿔 오시기도 했고 다리미로 구겨진 돈을 다려서 펴기도 했습니다. 거리엔 전도자도 많아서 웬만한 큰 거리에서 가스펠송을 듣는 경우도 많았지요. 주일이면 교회 가려고 옷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고 집을 나섰고요.

제가 기억하는 기독교인의 전형적 모습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대학생 때였던 것 같습니다. 서울 종로의 한 서점 옆 패스트푸드점을 지나가던 때였습니다. 한 외국인 여성이 혼자 앉아 햄버거를 앞에 놓고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소박한 식사에 진지한 기도. 저는 이 장면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기도 모습에서 뿜어져 나온 경건함은 주변을 압도하기 충분했습니다.

기도하는 그분 모습을 본 뒤 저도 그렇게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그때 순간적으로 하게 됐고 지금도 매일은 아니지만 어떤 날은 그렇게 그 여성처럼 기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단촐한 음식이지만 한 끼 식사를 공급해주신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모아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죠. 어디 식사뿐이겠습니까. 우리가 마주한 삶의 현실 앞에서 그렇게 두 손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이 있지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역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설립돼 해외 무역이 활발한 시절이었습니다. 서민들은 번영을 구하면서도 칼뱅주의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렘브란트 가정 역시 엄격한 칼뱅주의 신앙을 따르면서도 축젯날은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렘브란트, 빛과 혼의 화가’란 책의 저자 파스칼 보나푸는 렘브란트 가정의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성서를 읽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고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일도 없었다. 삶은 고기와 야채를 일주일에 한 번 조리해 그때그때 데워 먹는 가장 검소한 식사인 ‘호세포트’를 먹을 때에도 그들은 먼저 기도를 올렸다.”

이번 한 주 가장 검소하면서도 경건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유혈극
1099년 7월 15일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수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투르크족이 아니라 이집트 출신의 파티마족 아랍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참혹한 유혈극이 뒤따랐습니다. 모든 수비병과 아울러 시민들도 살해당했습니다. 여성들은 강간당했으며 유아들은 성벽에 던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시 내에 살던 많은 유대인은 회당 안으로 피신했고 십자군들은 그들을 안에 가둔 채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솔로몬 행각 근처에서는 피가 말의 무릎까지 차올라 흘렀다고 합니다.

십자군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의 한 장면.

빛의 화가, 렘브란트 출생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레인이 라이덴에서 태어났습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했으며 기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사라진 작품, '갈릴리 호수의 폭풍'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약 90점의 그림과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렘브란트는 1669년 사망할 때까지 그 어떤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과도 견줄 수 있는 걸작들을 제작했습니다. 붓과 분필, 에칭용 조각칼을 사용해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해냈습니다.

반 고흐는 1877년 9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렘브란트의 ‘이집트로 도피’ ‘예수의 매장’ 등 에칭화를 비롯해 ‘베다니의 집’ 같은 드로잉 작품을 보고 이런 말을 전합니다. “이 드로잉이 나에게 건네는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이며 삶의 광명을 얻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이전에는 결코 본적이 없었던, 그리고 이후에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 기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만드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 역사상 영원한 신비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아이작 와츠 출생
1674년 7월 17일 영국 사우스햄프턴에서 약 600편의 찬송가를 작곡한 아이작 와츠가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으나 천재였던 그는 5살 때 라틴어, 9살 때 그리스어, 11살 때 프랑스어를, 13살 때 히브리어를 배워 5개국어를 구사했습니다. 학구열이 높아 음악 철학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699년 마크레인에서 부목사로 일하는 동안 600여편의 찬송시를 작사하고 각 분야 책과 설교집, 신학 논문 등 52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은 한국교회 찬송가 중 ‘목소리 높여서’(6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20장) ‘이 날은 주님 정하신’(46장) ‘예부터 도움 되시고’(71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115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138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143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149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151장)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249) ‘나는 예수 따라가는’(349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353장) 등이 있습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완성자, 하인리히 불링거
1504년 7월 18일 취리히의 수석 목사이자 크랑머, 멜랑히톤, 칼빈, 베자와 가까운 동료였던 울리히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스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츠빙글리가 스위스에 영향을 준 이른바 개혁파 종교개혁의 효시라면 그의 후계자 불링거는 취리히에서 그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동시에 스위스와 유럽 전역에 그 종교개혁의 내용을 확대시킨 인물입니다.

1531년 27세의 나이로 취리히시 대표 목사가 된 불링거는 7만여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국가 취리히에서 130여명 목사들의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츠빙글리가 미완으로 남겨둔 종교개혁의 과제를 제도적으로 발전시키고 취리히 교회를 유럽 개신교에서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세워갔습니다.

그는 저작 ‘50편의 신학적 설교’ 등을 통해 개혁교회 목회자들의 신앙적 교양을 형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또 칼뱅 등 전 유럽의 목회자와 정치가 1000여명과 1만2000통의 서신을 교환하며 그들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연합을 추구한 것입니다. 그가 작성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당시 16세기와 17세기 스위스와 유럽 전역에서 공동의 신앙고백으로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 신앙고백서는 1562년 불링거의 개인적 고백과 증언에서 태동했습니다. 2년 뒤인 1564년 흑사병이 취리히를 덮쳤을 때 불링거 역시 감염됐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그는 이 신앙고백서의 초기 작품을 개정했습니다. 흑사병으로 아내와 세 딸을 잃은 그는 자신만 살아남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으로 시작해 개혁주의와 칼뱅주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조직신학의 전체 체계를 다룹니다.

불링거 종교개혁의 또 하나 특징은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을 동시에 추구한 츠빙글리를 계승해 교회와 시민 사회를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로 간주했다는 겁니다. 그는 취리히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교를 통해, 그리고 정치인들을 끊임없이 격려했습니다. 불링거는 빈민 문제, 고리 대금업 문제 등 당시 사회의 주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적극 나섰고 교회 개혁이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도록 힘썼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