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연계에는 국립정동극장이 내년부터 예전과 같은 전통 상설공연장으로 되돌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지난 3월 말부터 정동극장에 외국인 관광객 대상의 전통공연 상설화를 지시했다. 당초 문체부는 올 하반기부터 시작하라고 했지만, 정동극장이 공연 계약 취소에 따른 법적 문제로 난색을 보이자 내년부터 시작할 것을 하달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5월 말 유인촌 문체부 장관도 공연관광 활성화 관련 관계자 간담회에서 정동극장을 전통 상설공연장으로 바꾼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정동극장은 1991년 국내 최초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 복원 명분으로 설립이 추진돼 1995년 국립극장 분관으로 개관한 데 이어 이듬해 독립적으로 문체부 산하 재단법인이 됐다. 정동극장은 개관 초기부터 기획 공연과 함께 외국인 대상의 전통 무대를 만들어 주목받았다. 그러다가 낮 공연은 외국인 관광객 대상 전통 공연, 저녁 공연은 국내 관객 대상 기획 공연을 선보이는 형태가 자리 잡았다. 매일 2회씩 전통 공연을 하는 상설공연장은 유 장관이 첫 문체부 장관을 역임하던 2010년 4월부터다. 공연관광이 각광받던 당시 ‘난타’ ‘점프’ 같은 넌버벌 퍼포먼스와 달리 전통 기반의 작품을 선보인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정동극장은 2010년대 중반 관광 트렌드 변화와 넌버벌 퍼포먼스 난립에 따른 저가경쟁으로 위기를 맞았다. 민간단체와 저가 경쟁을 하기 어렵다 보니 극소수의 관광객만 찾게 된 것이다. 결국, 정동극장은 손상원 극장장 시절인 2017년 전통 상설공연을 7개월간 1일 2회 공연하고, 그 나머지 기간에는 전통을 토대로 젊은 창작자 발굴과 콘텐츠 개발에 역점을 둔 ‘창작ing’를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낮에는 전통 상설공연, 저녁에는 기획공연을 선보이는 이원 체제로 돌아왔다.
2019년 8월 취임한 김희철 대표이사(극장장에서 명칭 변경)는 2020년부터 상설공연을 아예 중단한 뒤 전통을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선보이는 극장으로의 변화에 나섰다. 특히 ‘국립’이란 타이틀을 달면서 정동극장은 ‘2차 제작극장’으로서 공공성을 추구하겠다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국내 공연 생태계가 창작자에게 공적 지원이 집중되면서 초연 이후 사라지는 작품이 많은 만큼 가능성 있는 1차 제작 콘텐츠를 발굴해 레퍼토리로서 유통시키는 거점이 되겠다는 것이다. 2022년 7월부터는 폐관 위기였던 세실극장의 운영을 맡아 2차 제작극장의 중간 단계 역할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정동극장이 전통 상설공연을 중단한 후 2차 제작극장으로 방향성을 정립하기까지의 과정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상급기관인 문체부와의 협의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유 장관 취임 이후 문체부가 국립 공연장 특성화 및 활성화 관련 재점검에 나서면서 정동극장의 정체성을 전통 상설공연장으로 규정했다. 현재 서울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볼 수 있는 전통공연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와 관련해 공연계에서는 정동극장의 갑작스러운 전통 상설공연장 회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정동극장이 2010년대 초반에만 잠깐 상설공연장으로서 제 역할을 했을 뿐 오랫동안 ‘잊혀진 극장’이었기 때문이다. 공연계 관계자들은 “지난 수 년간 만들어진 극장의 정체성을 문체부가 갑자기 바꾸는 것은 너무 일방적이고, 극장 종사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라면서 “문체부는 극장의 정체성을 바꿔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과정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동극장 내에서도 예산권과 인사권을 쥔 문체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2차 제작극장이라는 정체성을 버리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 지난 몇 년간 자체 기획 및 제작을 통해 선보인 작품이 좋은 평을 받으며 관객이 찾는 극장이 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전통 상설공연을 만들더라도 내년부터가 아니라 좀 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당장 내년 상반기에 예정된 작품들의 경우 구두 계약이긴 하지만 제작 관련 프로세스가 상당히 진행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인 국악 뮤지컬 ‘적벽’은 올해 11월 대구, 내년 3~4월 서울 공연을 위한 오디션이 올해 상반기에 마무리된 상태다. 복수의 정동극장 관계자는 “2026년 착공을 시작하는 재건축을 통해 극장이 2개 생기는 만큼 상설·기획 병행 등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성을 논의하길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정동극장 내에서 내년부터 바로 전통 상설공연장으로의 회귀가 어렵다고 보는 것은 완성도 있는 작품을 제작하고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충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통 상설공연장 시절 정동극장이 선보인 작품들 가운데 그나마 관객의 반응이 좋았던 것은 춘향전을 소재로 한 무용극 ‘미소’와 장녹수를 소재로 한 ‘궁-장녹수전’ 정도였다. 공연관광 관계자들은 “정동극장이 예전에 전통 상설공연장으로서 ‘미소’를 공연하던 때와 지금은 관광 트렌드가 많이 다르다. 또한, 공연관광 마케팅 역시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현재 정동극장에는 그런 인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신은향 문체부 예술정책관은 “2차 제작극장이라는 정동극장의 정체성에 대해 논란이 있다. 공공극장이 아니라 민간극장 방식으로 운영되는 데다 프로그램도 연극과 뮤지컬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라면서 “현재 국립 공연장들의 방향성 재점검과 관련해 국립정동극장의 전통 상설공연장화는 의견 조정 중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 그리고 이런 방향 전환도 문체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계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