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성경을 전 세계에!

입력 2024-07-01 05:39
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지난 주말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계신 지역은 안전하신지요? 비 피해가 없기를 바래봅니다. 비가 오면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지고 만사가 귀찮아지지요. 그런 독자님들을 위해 뽀송뽀송한 소식만 전해드리고 싶네요.

우선 더미션 홈페이지 관련해 최근 혼란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저희가 두어 달에 걸쳐 개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더미션으로 들어오셔서 기사를 클릭했을 때 국민일보(kmib) 홈페이지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는 정상이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독자게시판이나 외부 원고 등은 기존 더미션 홈피에서 편안하게 보실 수 있으니 계속 관심 부탁드립니다.

7월 세계 교회사 이야기, 이번 주엔 호텔 가면 항상 비치된 성경, 궁금하시죠? 누가 이 성경을 갖다 놓았을까. 바로 국제기드온협회입니다. 미국의 크리스천 사업가 3명이 전 세계에 성경을 배포하기 위해 의기투합해 만든 단체입니다. 사사 기드온의 이름처럼 이들은 확실한 사명을 위해 기드온 300용사처럼 성경을 배포하고 있습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이 협회 이름의 포켓용 성경 하나쯤 갖고 계시지요?

이 밖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개혁의 길로 인도한 뇌우 동반 폭풍우 이야기, ‘그리스도와 문화’를 쓴 리처드 니버 등을 만나보세요.

국제기드온협회 이야기
1899년 7월 1일 3명의 미국 여행 사업가들이 모여 기도하던 중 성경을 배포하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단체 이름을 기드온으로 정하고 9년 후인 1908년 몬테나 슈피리어호텔에 25권의 성경을 처음으로 비치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국제기드온협회는 이후 병원과 YMCA 등에 성경을 비치했고 1941년에는 군인과 간호사용 성경을 배부했습니다. 1946년에는 미국의 5학년부터 12학년까지 학생들에게 성경을 배부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최초의 회원국을 조직했습니다.


2015년 20억 권째 기드온 성경이 배부​됐으며 그해 전 세계 1300개 언어로 기드온 바이블앱을 제작했습니다. 2022년 25억 권째 기드온 성경이 배부됐습니다. 한국은 1963년 한국국제기드온협회가 조직됐습니다. 국제기드온협회 성경은 배포 대상에 따라 표지 색상을 다르게 합니다. 학생용은 청색, 군용은 녹색, 간호사용은 백색 등입니다.

폭풍우가 종교개혁의 서막?
1505년 7월 2일 독일의 폭풍우가 개신교 종교개혁의 시작을 도왔습니다. 부모님을 만나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마르틴 루터(당시 법대생)는 스토터하임 근처에서 격렬한 뇌우에 휩싸였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그는 “성 안나, 저를 도와주세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2주 후 그는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던 부친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냈고 심한 배반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루터를 수도원으로 이끈 것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구원과 저주는 그가 살았던 일상과 상황 속에 깊이 젖어 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신자들은 현세가 내세를 위한 준비와 시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세에서 법률가가 되어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해 영생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제시한 가장 확실한 길은 자신을 부인하는 수도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우울증과 신경불안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수련 수사 기간 동안 루터는 자신이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고 확신했습니다. 수도원 생활에서 행복과 평화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젊은 수도사 루터가 선행과 고행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결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루터는 항상 자신의 죄악성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그가 이를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죄의식은 더 강해졌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고백했지만 더 많은 죄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죄의식을 덜어 주어야 할 고해성사가 오히려 루터를 절망의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그는 신비주의자들의 저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그의 상급자였던 고해신부는 루터에게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라고 지시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가 히브리어 연구에 전념함으로써 영적 유혹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루터가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불안과 죄의식에서 해방되기를 바랐습니다. 루터는 실제로 성경 강의를 준비하면서 성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1513년부터 시편 강해를 시작한 그는 시편 기자가 1인칭으로 말할 때 이를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말씀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루터는 시편 찬송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비슷한 시련과 고난을 겪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대발견은 로마서를 강해하기 시작한 1515년의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로마서 1장에서 자기가 가진 난제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은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포했는데 루터는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 의라고 깨달았습니다.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지, 우리가 무언가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써 그후 하나님이 보상하신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믿음과 칭의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발견에 대한 감격을 루터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느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이 내 가슴 속을 미움 대신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달콤함으로 채워 주었다.”

그리스도와 문화
1962년 7월 5일 신학자이자 예일대 교수인 리처드 니버가 별세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문화’(1951)는 대표작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늘 제기되었던 ‘그리스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전형적인 응답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니버는 에른스트 트뢸치가 주창한 교회 유형과 분파 유형을 확장해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라는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했습니다.


독일계 이민 1세대 목사였던 구스타프 니버와 독일계 이민 2세대인 리디아 호스토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리처드 니버는 미국 신학의 큰 맥을 이룬 형 라인홀드, 맥코믹 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 교수로 일생을 바친 누이 훌다 등과 함께 독일복음주의 교회의 영향력 아래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니버는 1918년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24년 예일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31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예일대에서 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쳤습니다. 미국 신정통주의의 좌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054년 7월 6일 로마 교황의 대리인들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의 교회로 행진하여 제단에 황소를 올려놓고 그를 파문했습니다. 이후 7월 20일 로마 교회에서 파문당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가 교황 레오 9세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 대분열이 촉발됐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