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망치를 소모하는 것은 모루"

입력 2024-06-24 05:50
안녕하세요. 더미션입니다.
주말 사이 전국에 걸쳐 비가 내렸습니다.
6월 때아닌 무더위를 식혀줘서 좋긴 했는데 장마의 시작으로 폭우 피해가 없기를 바래봅니다. 요즘 기후변화로 전 세계가 물난리와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건강한 한 주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에는 유명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장 칼뱅의 후계자로서 칼뱅과 함께 제네바 아카데미를 운영했던 베자를 비롯해 십자가의 요한, 펄벅 여사가 태어나고요. 2세기 신학자였던 이레나이우스, 중세 이슬람 세계의 선교사였던 라몬 룰이 순교합니다. 교회사 이야기는 우리가 믿는 신앙과 신학이 수천 년 역사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한국교회는 또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는 걸까요.

이번 주는 6·25전쟁일이 포함돼 있습니다. 한국교회 차원에서 23일 주일엔 한교총이 주최한 기념예배가 있었고 지역교회들은 참전용사를 위한 보은 행사도 열었습니다. 기념예배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최근 한반도 상황은 계속해서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만 외칠 게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비상시국인 것 같습니다.

칼뱅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 출생
1519년 6월 24일 장 칼뱅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가 프랑스 베젤레이에서 태어납니다. 베자는 인문주의자, 개신교 신학자, 성서번역자, 교수, 외교관, 시인이었습니다. 푸아시 회의와 종교전쟁 기간 중 개혁 진영의 대변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전 유럽을 통틀어 개혁 원리에 대해 견줄 이가 없는 대가였으며 장 칼뱅의 뒤를 이어 제네바아카데미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베자는 9살에 칼뱅의 은사이기도 한 멜키오르 볼마르라는 유명 헬라어 학자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접했습니다. 파리에서 학자이자 시인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며, 삼촌의 영향력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두 개의 성직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전염병에 걸린 이후 이를 계기로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가톨릭 성직을 모두 내려놓고 아내 클로딘과 함께 제네바로 갑니다. 그곳에서 베자는 칼뱅과 함께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가의 삶을 살아갑니다. 베자는 칼뱅과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서 학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은 졸업생들은 프랑스를 비롯해 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해 개신교 지도자로서 헌신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2년 만에 50개였던 개혁교회가 2000개 이상으로 성장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베자는 당대 기성세대의 영적 성장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다음세대의 영적 성장을 준비했던 교육자이자 종교 개혁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자는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들이 박해를 받자 박해자를 망치로, 순교자를 모루로 비유하면서 “망치들을 소모하게 하는 것은 모루”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의 저자 십자가의 요한 출생
1542년 6월 24일 로마 가톨릭의 개혁가이자 신비주의자, 시인인 십자가의 요한이 스페인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납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제자였던 그는 시 ‘영혼의 어두운 밤’과 ‘영적 성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젊은 시절 카르 멜 수도자가 됐습니다. 이후 아빌라의 테레사를 만나 카르멜수도원을 개혁하려는 그녀의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그녀는 젊은 수도자의 높은 영적 수련을 알아보았고 27세나 연하였지만 요한은 그녀의 고해성사 담당 신부 겸 영적 지도자가 됐습니다.


그들의 개혁 작업은 반대파의 원성을 자아내 한번은 요한이 감옥에 9개월이나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요한은 카르멜 상급자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작은 감방 창문을 통해 탈출하기는 했으나 이 사기당한 고통은 이후 여러 저작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과 ‘영적 성가’는 투옥 중 쓴 시였습니다.

어두운 밤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영적 여행을 이해하는 요소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어두운 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 초보 상태에서 중급반으로 이동시킬 때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영적 초보자는 거만함과 질투, 죄 이해 부족, 죄악을 저지르고 싶은 절망감에 빠져드는 경향 등의 부정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데, 어두운 밤은 이를 우리에게서 벗겨낸다고 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어두운 밤을 통과하면 영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타인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해드려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늘 가르침을 받으려는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신자들이 통과하는 어두운 밤을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하나는 감각(신체)의 어두운 밤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어두운 밤입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출
1530년 6월 25일 루터교도들이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독일 제국의회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신앙 요약문을 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하며 낭독합니다. 필립 멜란히톤이 대부분 작성했으며 마르틴 루터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고백서의 표현은 비교적 온건했는데 1540년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화의(和議)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58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50주년을 맞아 루터교는 루터교회의 모든 공식적인 신앙고백을 담은 ‘콩코드 신경’을 독일어로 출판했습니다.

1744년 6월 25일 런던에서 최초의 감리교 연회가 열립니다. 지도자들은 1739년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에 의해 촉발된 ‘복음주의 부흥’에 조직적인 틀을 제공하면서 교리 전례 권징에 대한 기준을 정했습니다.

1865년 6월 25일 영국인 선교사 J.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합니다. 선교사들은 ‘믿음선교’를 추구했습니다. 급여를 보장받지 못했고 기금을 요청할 수도 없었으며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들은 중국 복장을 채택하고 중국 내륙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지’의 작가, 펄 벅 출생
1892년 6월 26일 중국 장로교 선교사이자 베스트셀러 ‘대지’(1931)의 저자 펄 벅이 태어났습니다. 퍽 벅은 인간의 삶과 숙명적 굴레를 리얼리즘 서사로 표현했으며, 중국인보다 중국을 더 사랑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상과 동시에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인도주의적인 부분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인종 간 이해를 위한 가교 형성에 헌신했습니다.


생후 3개월 만에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10년 대학을 다니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8세까지 중국에서 성장한 그녀는 중국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고향이었습니다.

1917년 중국 농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 박사와 결혼을 했는데 큰딸은 극도의 정신박약아였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큰딸이 자신을 작가로 만든 동기 중 하나라고 밝혔습니다.

중국에서 사는 동안 겪었던 역사적 사건과 중국인 유모에게서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미국인인 그녀가 중국의 영혼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고 예리한 작품을 그려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국공내전 와중에 1927년 국민당 정부군의 난징 공격 때 온 가족이 몰살당할 뻔했던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1930년 데뷔작 ‘동풍 서풍’을 출간했고 빈농 신분에서 대지주가 되는 왕룽(王龍)을 중심으로 그 처와 아들들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를 이듬해 출간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엔 전후 황폐한 사회에 내던져진 전쟁고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 펄 벅 재단을 설립해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태어난 사생아 입양 사업을 벌이는 등 봉사 활동에 나섰습니다.

한국과는 유한양행 유일한 창업주와 교류하면서 한국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한국을 방문해 스스로 박진주(朴眞珠)라는 한국어 이름도 지었습니다. 한국 전쟁 후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와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 등 한국 관련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1965년에는 다문화아동 복지기관인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했습니다. 1967년 경기도 부천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10여년간 한국의 다문화아동들을 위한 복지 활동을 펼쳤습니다.

일생 소설과 수필, 평론, 아동서적에 이르기까지 80여권을 집필했으며 5개의 장편소설만 존 세지스라는 필명으로 출간했습니다. 1973년 3월 6일 81세로 생가가 있는 그린힐즈 농장에 묻혔습니다.

“하나님은 목자” 2세기 첫 신학자 이레나이우스 별세
195년 6월 28일 프랑스 리용의 주교이자 2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저술가 중 한 명인 이레나이우스가 별세합니다. 그는 초대교회 교부이자 신학자이며 변증가였습니다. 소아시아 서머나(현재의 튀르키예 이즈미르)에서 출생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에게서 배웠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했으며 리용의 박해 때 순교한 포티노 주교의 뒤를 이어 178년 감독이 되었습니다.


목회자였던 그는 교인들을 기독교 생활과 신앙 속에 이끌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작품 중 2개가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사도적 신앙의 증명’이란 작품은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강해합니다. ‘소위 지식에 대한 반박’ 또는 ‘이단을 반박함’이란 두 번째 책은 당시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이레나이우스를 비롯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등은 기독교 전반의 교리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저술을 썼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특정 신앙의 문제나 박해 등을 취급할 뿐이었지 기독교 교리 전체를 토론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2세기 말 등장하는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은 기독교 전반의 설명과 교리를 체계화시켜 정통 신학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레나이우스의 저작은 2세기 말 교회의 신앙 상태를 보여주는 뛰어난 자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했습니다. 목자가 그의 양 떼를 사랑하고 이끌듯, 이 피소세계를 사랑하고 이끌고 싶기 때문에 창조하셨던 사랑의 존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 역사는 이 목자께서 피조 세계를 최종 목표에까지 이끌어가시는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들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성숙해가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양손에 의해 교훈을 받습니다. 양손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기독 교회의 첫 번째 신학자로 간주합니다.

이슬람 선교의 선구자, 라몬 룰 순교
1315년 6월 30일 평신도 선교사이자 신비주의자, 철학자였던 라몬 룰(Ramon Lull)이 무슬림의 개종을 촉구하는 환상을 받고 북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부기아에서 돌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30세가 될 때까지 시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그리스도가 세 번이나 반복해 나타나 그를 부르는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그 부르심에 개종한 라몬 룰은 그 후 50년간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시인, 변증가였던 그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그리스도 세계를 경험합니다. 파리나 몽펠리에의 대학들, 아라곤, 시칠리아, 싸이프러스 국왕들의 궁전 등을 방문합니다. 룰은 당시 서유럽 세계와 대립했던 사라센, 즉 무슬림 제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라센 복음화를 위해 세 가지 요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사라센 언어에 대한 폭넓고 정확한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1311년 빈회의는 라몬 룰의 간청을 받아들여 로마,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살라망카 등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에 이슬람 세계의 언어 연구를 위한 5개의 단과대학을 설립하게 합니다. 라몬 룰은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그리스어를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 진리가 필연적 이치임을 밝힐 책을 출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룰이 이런 제안을 한 것은 학식 있는 무슬림교도들의 개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사라센 복음화를 위해서는 순교도 불사하겠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무슬림들과 네 번이나 대면해 토론을 벌였고 네 번째 방문길인 1315년 부기아(Bugia)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고 순교했습니다.


1881년 6월 30일 장로교 목사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제 폐지론자인 헨리 하이랜드 가넷이 라이베리아의 장관으로 임명됩니다. 노예였던 가넷은 1843년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폭력적인 반란을 촉구하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낫다”고 설교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